이븐 할둔의 눈으로 본 인간 사회의 본질과 되풀이되는 시간의 서사
‘톺아보기’의 두 번째 책은 14세기 이슬람 세계의 사상가, 이븐 할둔(Ibn Khaldun)의 『역사서설(Al-Muqaddimah)』이다. 그는 역사를 단순한 과거의 축적이 아닌, 사회를 이해하는 과학적 도구로 바라보았다. 이 관점은 서구 근대 이전에 쓰였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구조적이고, 기능주의적이며, 순환론적인 사유를 담고 있다. 『역사서설』은 문명의 기원과 인간 사회의 동학, 권력의 구조와 몰락에 이르는 과정을 폭넓고 깊이 있게 조망한다.
아사비야(Asabiyyah): 공동체 결속의 힘
이븐 할둔이 제시한 가장 독창적인 개념 중 하나는 ‘아사비야’다. 이는 특정 집단이 지니는 내부 결속력, 사회적 응집력, 연대 의식을 뜻한다. 특히 유목 사회에서 아사비야는 생존을 위한 협력의 힘으로 작용하며, 이 결속력은 왕조나 문명을 탄생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그는 유목민의 강한 아사비야가 초기 통치의 동력이며, 이들이 도시로 정착하고 생활이 풍요로워지면 자연스레 결속이 느슨해지고 사치와 타성이 팽배해진다고 보았다. 이때, 보다 강한 아사비야를 지닌 새로운 집단이 등장해 기존의 권력을 대체하게 된다.
이 같은 구조는 단지 중세의 왕조사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오늘날 기업, 정치 세력, 사회 운동에서도 유사한 패턴이 반복된다. 혁신과 이상으로 뭉친 초기의 작은 집단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지만, 시간이 지나 내부가 관료화되고 동력이 소진되는 순간, 또 다른 ‘변화의 결속’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도시와 권력, 그리고 몰락의 반복
이븐 할둔은 ‘아사비야’ 개념을 기반으로 도시 문명의 흥망에 대해 치밀하게 분석했다. 그의 시선에서 도시화는 문명의 정점이자 동시에 몰락의 출발점이다. 문명이 발전하며 도시가 번성할수록 도덕적 타락, 경제적 불균형, 권력의 부패가 뒤따르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는 모든 권력이 일정한 순환 주기를 거친다고 보았다. 대체로 3~4세대에 걸쳐 흥기와 절정, 쇠퇴, 몰락의 단계를 지나며 권력은 교체된다. 이 주기는 단순한 왕조의 교체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조직, 정치 집단, 심지어 개인의 삶에서도 유사한 흐름이 반복된다. 성장과 정체, 해체라는 사이클은 어느 시대나 동일한 법칙을 따르는 듯 보인다.
오늘날의 정치학자들은 이를 ‘정치적 자본의 소진’ 혹은 ‘제도적 침식’이라 설명하며, 이븐 할둔의 통찰과 유사한 맥락에서 권력과 도덕, 체계의 관계를 논하고 있다. 그가 고대 왕조의 몰락에서 읽어낸 통찰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현대와의 연결: 왜 『역사서설』이 여전히 유효한가
이븐 할둔은 흔히 ‘사회과학의 선구자’로 불린다. 그는 역사적 사건을 연대기적으로 나열하기보다는, 그 이면에서 작동하는 원인과 구조를 분석했다. 인간의 본성, 환경, 경제, 정치, 종교가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며 사회 변화가 일어난다는 그의 시각은 놀라울 만큼 현대적이다.
그의 이론은 이후 막스 베버, 에밀 뒤르켐, 아널드 토인비와 같은 근현대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더 나아가 중동의 정치적 격동, 공동체의 해체, 제국주의의 재등장 등 현대사회의 흐름을 분석하는 데도 여전히 유효한 해석의 틀을 제공한다. 특히 세계화 이후 국가 간 경계가 흐려지고, 내부 결속이 약화된 오늘날의 세계에서 그의 사상은 더욱 깊은 울림을 가진다.
함께 보면 좋은 작품: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이븐 할둔의 사유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책으로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있다. 하라리는 인간 사회를 문화, 제도, 신화가 구축한 ‘허구적 질서’ 위에 세워진 것으로 보며, 국가·종교·경제 시스템이 어떻게 인간의 협력을 이끌어냈는지를 설명한다. 이 점에서 『사피엔스』의 핵심 주제는 『역사서설』의 아사비야 개념과 깊이 연결된다.
두 책은 서로 다른 시대와 언어를 기반으로 쓰였지만, 인간 문명의 본질을 파고드는 집요한 사유라는 점에서 맞닿아 있다. 전자는 ‘어떻게 문명이 흥하고 무너지는가’를 묻고, 후자는 ‘인간은 어떻게 허구를 믿고 질서를 유지하는가’를 질문한다. 둘을 함께 읽는다면 고대와 현대, 전통과 현재를 가로지르는 문명의 역학을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함께 보면 좋은 콘텐츠〉
『역사서설』을 읽고 난 뒤, 더 깊은 사유로 이끄는 영화와 다큐멘터리
《Collapse》(2009, 다큐멘터리)
•이븐 할둔의 몰락론을 현대의 시선으로 본다면.
문명의 붕괴는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내부 결속의 약화, 자원의 고갈, 정치적 탐욕—『역사서설』이 묘사한 문명의 순환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걸 보여주는 인터뷰 중심의 다큐멘터리.
《킹덤 오브 헤븐》(2005, 영화)
•이븐 할둔의 시대를 체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역사 드라마.
이슬람과 기독교 세계의 충돌, 왕조의 권력 구조, 종교와 권위의 상호작용은 『역사서설』에서 말한 사회 동학의 극적인 사례로 읽힌다.
《The Square》(2013, 다큐멘터리)
•‘아사비야’의 현대적 사례.
아랍의 봄을 배경으로 한 이집트 시민 혁명의 다큐멘터리. 혁명의 시작엔 강력한 결속이 있었지만, 곧 균열과 내부 갈등이 뒤따른다. ‘공동체적 연대의 힘’과 ‘쇠퇴의 패턴’이 동시에 드러나는 생생한 장면들.
BBC 다큐 시리즈 《문명(Civilisations)》
•문명은 어떻게 시작되고, 왜 사라지는가.
시각적이고 구조적인 접근으로, 인류 문명의 성장과 몰락 과정을 역사적 사건과 유물 중심으로 짚는다. 『역사서설』의 거대한 주제를 영상으로 체감하고 싶을 때 추천.
EBS 지식채널e – ‘문명과 권력’ 편
•짧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5분 인문학.
권력의 순환, 사회적 붕괴, 제도의 작동 원리 등 이븐 할둔의 사유와 맞닿는 영상들을 큐레이션 형식으로 소개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