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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홉스봄의 ‘시대 3부작’

혁명, 자본, 제국으로 읽는 근대의 서사

by 콩코드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가? 격동이라 부를 만한 사건들이 이어지고, 과거는 자주 왜곡되거나 잊힌다. 이럴 때일수록, '과거의 흐름'을 꿰뚫어본 한 사람의 지성이 더없이 귀하다. 에릭 홉스봄. 그는 ‘시대 3부작’을 통해 단지 연대기를 쓰는 것을 넘어서, 사회 구조의 변화와 그 이면의 힘들을 탁월하게 분석해냈다. 이 글은 그 3부작을 하나의 긴 이야기처럼 엮어 읽어보려는 시도다. 단지 책의 내용을 요약하기보다, 각 책이 던지는 질문과 통찰을 오늘의 눈으로 함께 되새겨보고자 한다.


『혁명의 시대: 1789~1848』 - 새로운 세계의 서막


이 책은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근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을 탐색한다. 홉스봄은 혁명을 사건이 아니라 '구조적 전환'으로 이해한다. 기존의 봉건적 질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와 시민계급의 질서가 도래하는 흐름. 단지 왕정이 무너졌다는 사실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과 노동, 삶의 방식이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변형되었다는 점에서 이 시대는 '파열'의 시간이 된다.


그러나 홉스봄은 이 새로운 세계에 대해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 산업화는 진보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동시에 빈곤과 노동착취, 불균형의 씨앗을 함께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이후 두 시대의 전개를 암시하는 복선이기도 하다.


『자본의 시대: 1848~1875』 - 안정의 그늘, 불균형의 성장


1848년의 혁명은 유럽 전역에서 터져 나왔지만, 그 열정은 곧 자본과 제국의 힘에 흡수된다. 이 시기는 얼핏 보기에는 안정과 번영의 시대처럼 보인다. 그러나 홉스봄의 눈은 그 이면을 놓치지 않는다. 자본은 국경을 넘어 팽창하고, 민족주의는 내부 결속을 위해 동원된다. 이 과정에 ‘보이지 않는 손’보다 훨씬 더 복잡한 권력과 이념의 작용이 있었다는 것을 그는 날카롭게 지적한다.


특히 이 시기의 특징은 '타협의 시대'라는 점이다. 부르주아지는 노동자 계급의 반발을 회피하면서도, 어느 정도의 양보를 통해 체제를 유지하는 방법을 배운다. 겉으로는 평화로웠지만, 속으로는 새로운 긴장과 분열의 축이 자라나던 시기다. 홉스봄은 이 점을 통해 '자본주의적 안정'이라는 개념의 함정을 지적한다.


『극단의 시대: 1914~1991』 - 파국 속에서 인간은 무엇을 꿈꾸는가


20세기의 문을 연 것은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도 또 하나의 전쟁이 있었다. 홉스봄은 이 시대를 '극단'이라 부른다. 전례 없는 파괴와 동시에,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복지와 과학의 진보가 공존했던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시기를 단순히 냉전이나 파시즘의 대립으로만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만든 체제들이 얼마나 무력하게 실패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험의 시기'로 이해한다. 공산주의의 몰락, 자본주의의 세계화, 제3세계의 저항 등 수많은 모순들이 겹쳐져 있는 이 시대는, 인간 존재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진보하고 있는가?"


홉스봄의 마지막 메시지는 명확하다. 역사는 단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오늘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것이다. 그는 독자들에게 '비판적 기억'의 중요성을 일깨우며, 망각의 시대를 건너는 법을 가르친다.




함께 읽으면 더 깊어지는 책들

- 에릭 홉스봄의 시선과 시대를 입체적으로 비추는 다섯 권의 책


홉스봄의 시대 3부작은 단지 세 권의 역사책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묻는 시대의 거울이다. 그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되는 책들이 있다. 함께 읽으면 홉스봄의 사유가 지닌 깊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우리가 사는 세계의 구조와 그 역동성에 대해서도 보다 입체적인 시야를 가질 수 있다.


1. 《역사란 무엇인가》 / E. H. 카 (김택현 옮김, 까치)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명제로 잘 알려진 이 책은, 역사란 객관적 사실의 집합이 아니라 질문과 해석의 산물임을 일깨워둔다. 홉스봄이 역사를 읽는 방식의 철학적 뿌리를 이해하고 싶다면 이 책이 좋은 출발점이 된다.


2. 《상상의 공동체》 / 베네딕트 앤더슨 (서지원 옮김, 나남)

국가는 어떻게 하나의 ‘공동체’로 상상되었는가? 홉스봄이 민족주의의 정치성과 허구성을 분석했다면, 앤더슨은 그것이 어떻게 문화적·언어적으로 구성되는지를 탁월하게 보여준다. 현대 민족국가의 기원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책이다.


3. 《근대 세계체제》 (1·2권) / 이매뉴얼 월러스틴 (임현진·이희범 옮김, 창비)

홉스봄이 ‘장기 19세기’라 부른 시기, 자본주의는 어떻게 세계를 관통하며 확장되었는가? 월러스틴의 구조적 시각은 홉스봄의 시대 해석을 세계 체제의 관점에서 보완해 준다. 자본과 권력의 불균형을 꿰뚫어보는 데 유용한 안내서다.


4. 《국민국가와 민족주의》 / 에릭 홉스봄 (이순희 옮김, 책과함께)

3부작을 읽은 독자에게는 이 짧지만 밀도 높은 책이 큰 울림을 준다. 홉스봄의 후기 사유를 통해 민족주의와 국가 형성의 근대적 조건을 더 정교하게 바라볼 수 있다. 현재의 정치적 갈등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는 주제다.


5. 《20세기 다시 보기》 / 토니 저트 (유강은 옮김, 열린책들)

홉스봄의 작업이 ‘세기말’에서 멈춘 뒤, 유럽은 어디로 향했는가. 저트는 20세기 후반 유럽의 변화와 그 의미를 날카롭고도 사려 깊게 정리한다. 홉스봄 이후의 시대를 읽는 두 번째 안내서가 되어줄 책이다.




작가의 말

시대를 건너는 당신에게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다른 시대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꾸기 위해 과거의 파편들을 조각하고, 그 조각을 통해 오늘을 바라보는 일. 에릭 홉스봄은 그런 독서의 힘을 믿었던 사람이고, 나 또한 그 믿음 안에서 이 글을 썼다.


이 세기의 지성은 ‘혁명의 시대’에서 시작해 ‘자본의 시대’를 거쳐 ‘극단의 시대’를 통과하며 우리가 지나온 세계의 윤곽을 그려준다. 그러나 그 윤곽선은 결코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여전히 불평등과 전쟁, 그리고 냉소와 절망이 뒤엉킨 이 시대에도 그의 통찰은 유효하다. 그가 묻는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 물음 앞에 오래 머무는 독자들이 있다면, 이 글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길동무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당신도 다시 누군가에게 이 책들을 권해주기를 바란다. 시대는 언제나 독서로부터 다시 시작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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