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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진보》 진보의 역설,권력의 그늘에서

이상이 현실을 덮을 때, 우리는 어디를 바라보아야 할까

by 콩코드


진보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시대마다 다른 대답을 요구했다. 어떤 이에게는 더 나은 세상을 향한 행진이었고, 또 다른 이에게는 권력의 새 옷일 뿐이었다. 진보는 언제나 내일을 말했지만, 그 내일은 종종 누군가에겐 억압이었고, 또 누군가에겐 잊힘이었다.


이 책은 그 질문에서 시작된다.

진보의 이상이 얼마나 자주, 권력의 언어로 변형되었는지를 추적하며, 우리는 한 가지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진보는 항상 옳지 않았다. 혹은, 그 말이 항상 누구에게나 옳게 작동하지는 않았다.


철학의 언어와, 정치의 사건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뉴스 헤드라인까지. 이 책은 추상과 구체, 과거와 현재를 가로지르며, 진보라는 말의 의미와 무게, 그리고 그것이 빚어낸 세계를 다시 묻는다. 진보를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진보하려면 무엇을 직면해야 하는가를 탐색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 하지만,

그 '더 나음'이 누구의 관점이며, 어떤 권력의 산물인지,

그리고 어떻게 배제와 차별을 감춘 채 말해졌는지 묻지 않는다면,

진보는 또 하나의 신화로 전락할 것이다.


이 책은 그 물음을 향해, 조심스럽지만 단단하게 다가간다.

그리고 독자 여러분과 함께, 그다음의 가능성을 열어보고자 한다.

이상 너머, 현실을 직면한 자리에서.



1장. 이상이라는 이름의 신화

– 진보는 왜 믿음이 되었는가


1. 진보는 믿음이었다


진보는 논리 이전에 감정이었다.

더 나은 세계가 가능하다는 희망, 지금의 고통이 미래에는 사라지리라는 믿음, 그 미래는 반드시 현재보다 나을 것이라는 어떤 정서적 확신.

이것은 계몽주의 이후 유럽을 지탱해 온 가장 강력한 믿음 중 하나였다.


17세기와 18세기의 유럽은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야 할 시대로 그려졌다. "이성의 해방", "인간 중심의 세계관", "종교로부터의 해방" 같은 말들은 단순한 철학적 전환을 넘어, 문명의 진보라는 거대한 서사의 기둥이 되었다.

진보는 단순한 방향이 아니라, 도덕적 선과 동일시되는 운동이 되었다.


2. 계몽의 도그마: 진보는 언제나 좋은가?


진보는 어느 순간, 비판 불가능한 신념이 되었다.

계몽주의의 유산은 이성의 힘이 인간 사회를 점점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것이라는 낙관론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진보하지 않는 존재나 문화에 대한 우월적 시선이 자리 잡았다.


식민주의는 이 신념을 도구로 사용했다.

"문명의 사명"이라는 이름 아래, 유럽은 타 문명을 미개하다고 규정하고 '더 나은 길'로 이끈다는 명분으로 침탈과 지배를 정당화했다.

진보는 선택지가 아니라 규범이 되었고, 강요되는 기준이 되었다.


3. 진보를 가능하게 한 철학들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켰고, 이는 자연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적 기반이 되었다. 칸트는 ‘이성의 자율성’을 강조했고, 헤겔은 정신의 변증법적 진보를 사유의 핵심으로 삼았다.

그들의 철학은 단지 사유 체계가 아니라, 역사의 진행을 설명하고 예언하는 서사였다.


헤겔에게 역사는 단순한 사건들의 나열이 아니라, 정신의 발전 과정이며, 각 시대는 그것을 담는 ‘그릇’에 불과했다. 이 진보의 서사는 마르크스에게 계승되며, 계급투쟁이라는 동력을 통해 더 나은 사회, 공산주의로의 진입을 이끌어낼 것으로 확신했다.


여기서 핵심은,

진보는 "필연적"이라는 믿음이었다.

역사는 나아가야만 했고, 인간은 그 방향으로 함께 가야만 했다.


4. 진보는 누구의 언어였는가


그러나 진보라는 언어는 누군가가 말한 것이고, 누군가는 말하지 못한 것이다.

산업화의 그늘에서 일하던 노동자들, 문명이라는 이름 아래 침탈당한 식민지 민중들, 제국의 울타리에서 소외된 여성들.

그들은 진보의 무대에 등장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이상은 특정한 중심에서 시작되었고, 주변은 종종 그 이상에 끌려가거나, 밀려나거나, 침묵당했다.

진보는 ‘함께 나아가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실은 누가 함께 할지를 결정하는 권력의 언어였다.


5. 진보의 신화를 다시 읽는다


이상이 힘이 될 때, 그것은 꿈이 아니라 명령이 되기 쉽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열망은, 그 자체로 아름답지만, 그 열망이 특정한 방식으로만 실현될 수 있다는 전제는 언제나 폭력의 씨앗이 된다.


그래서 이 장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이렇게 묻는다:

진보는 정말 모든 사람을 위한 이름이었는가?

그 이상은 누구에게 말을 걸었고, 누구를 침묵시켰는가?


진보를 해체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 아니다.

진보를 제대로 다시 말하기 위해, 그것이 어떻게 신화가 되었는지를 직시하려는 시도, 그것이 이 책의 첫 번째 출발점이다.



2장. 진보의 이면, 침묵당한 존재들

– 중심에서 밀려난 타자들, 그들 또한 역사를 만들었다


1. 진보의 경계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


진보는 ‘더 나은 사회’를 약속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똑같은 내일을 약속한 것은 아니었다.

진보의 중심에는 보통, 서구 백인 남성, 중산층, 시민 계급이 있었다. 그들이 상상한 이상은, 바로 그들을 기준으로 설계된 것이었다.


반면, 여성, 유색인, 식민지 주민, 성적 소수자, 빈민은 진보의 시야 밖에 놓인 존재들이었다.

그들의 삶은 진보라는 말로 설계된 역사 속에서 도구로 소환되거나, 아예 배제되었다.

진보는 함께 나아간다고 말했지만, 누구를 ‘우리’에 포함시킬지 결정한 건 언제나 중심부였다.


2. 식민주의와 진보의 모순


19세기 유럽 제국은 자신들의 식민 확장을 ‘문명의 진보’로 정당화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서구가 동양을 어떻게 ‘타자화’하고 미개한 존재로 구성했는지를 폭로했는데, 이는 단지 인식의 문제가 아니었다. 진보의 이상이 실제로 권력과 폭력의 명분으로 쓰였다는 역사적 증거였다.


19세기 프랑스혁명의 구호 ‘자유, 평등, 박애’는 식민지 민중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았다. 알제리에서, 인도차이나에서, 수단과 콩고에서, 진보는 착취의 얼굴로 나타났다.

피식민지는 ‘아직 문명에 도달하지 못한 존재’로 묘사되었고, 따라서 ‘진보의 교육’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침탈은 정당화되었다.


진보는 진심이었을지 모르나, 그 실현 방식은 권력이었다.


3. 여성, 진보의 영원한 타자


근대 시민사회에서 ‘보통 사람’은 남성이었다.

프랑스혁명은 여성에게도 자유를 약속했지만, 여성은 여전히 사적 영역에 머물러야 할 존재로 간주되었고, 시민권에서 배제되었다.

올랭프 드 구즈의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은 비웃음과 처형으로 돌아왔다.


20세기 여성참정권 운동은 그저 사회의 발전에 따른 ‘자연스러운 수순’이 아니라, 진보의 언어 속에 묻힌 저항의 역사였다.

심지어 현대 진보 정당들조차도 오랜 시간 동안 여성 문제를 ‘부차적인 이슈’로 간주했다.

진보는 오랫동안 남성의 이름으로 말해진 언어였다.


4. 계급의 탈진과 ‘불편한 진보’


진보가 ‘모두의 이익’을 말할 때, 노동자 계급과 하층민의 경험은 종종 수치화된 통계로만 등장했다.

산업혁명의 진보는 누구에게는 전기와 철도였지만, 또 누구에게는 어린 나이의 노동과 16시간 노동이었다.

칼 폴라니가 말한 것처럼, 시장의 자기 조절은 인간 삶의 파괴를 대가로 한 것이었다.


20세기 후반, 신자유주의가 ‘자율’과 ‘혁신’이라는 진보의 언어로 돌아왔을 때, 공장과 광산은 문을 닫았고, 지역 공동체는 해체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의 진보는 이중적인 얼굴을 가진다.

어떤 이들에겐 더 많은 선택지와 자유를, 다른 이들에겐 실업과 불안정을 가져온다.


5. 진보는 왜 그들을 설명하지 못했는가


진보가 강한 이유는 미래를 선점하는 힘에 있다.

그러나 진보가 설명하지 못한 타자들의 삶은 역사의 그림자 속에 갇히거나, ‘낙오자’라는 이름으로 정리되었다.

그들은 사회의 미래를 향한 동력으로 간주되지 않았고, 진보의 실패나 비극은 언제나 그들의 탓으로 돌려졌다.


"왜 그들은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는가?"

"왜 여전히 전근대적인 방식에 머무르는가?"

이런 질문은 진보의 이름으로 던져졌지만, 그 속에는 구조적 배제와 권력의 시선이 숨겨져 있었다.



3장. 말해진 진보, 말해지지 않은 권력

– 현대 정치 담론 속의 진보와 권력 구조


1. 진보는 어떻게 언어가 되었는가


20세기 후반 이후, ‘진보’는 더 이상 단지 이상이나 방향이 아닌, 정치적 브랜드가 되었다.

정당은 자신들의 노선을 설명하기 위해 ‘진보’라는 말을 사용했고, 언론과 지식인 담론은 그 의미를 지속적으로 생산하고 재구성했다.


미국 민주당, 영국 노동당, 프랑스 사회당, 한국의 진보 정당들까지—각기 다른 맥락에서도 이들은 공통적으로 ‘변화’와 ‘개혁’의 상징어로서 진보를 사용했다.

그러나 그 진보는 무엇을 바꾸고, 무엇은 그대로 두었는가?


‘진보’는 변화의 의지를 담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구체적 현실 속에서 타협된 언어였다.


2. 진보적 담론의 제도화


진보는 제도에 담겼을 때, 그 명확한 내용을 갖는다.

복지 정책, 기본소득, 탄소중립, 젠더평등, 노동시간 단축 등은 진보 담론이 실현된 대표적 장면이다.

그러나 이 제도화는 동시에 ‘진보는 이미 구현되었다’는 착각을 낳기도 한다.


진보는 정책이 되었지만, 그 정책이 누구에게 도달하는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예컨대 노동시간 단축은 정규직과 공공부문에 국한되었고, 기본소득 논의는 취약계층이 아닌 청년 세대의 ‘정치적 상징 자산’으로 소모되기도 했다.


진보가 제도화될 때, 그 본래의 급진성은 흔히 사라지며, 중산층 중심의 타협적 조율로 재구성된다.


3. 미디어와 ‘진보의 서사’


현대 정치에서 진보는 담론의 경쟁이기도 하다.

이때 미디어의 역할은 결정적이다.

정당이나 정치인은 단지 정책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진보성’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설계해야 한다.


여기에서 생기는 문제는 ‘정책’보다 ‘태도’와 ‘상징’에 더 많은 관심이 기울어진다는 점이다.

그 결과 진보는 종종 구체적인 현실 개선이 아닌, 태도적 우월감이나 문화적 정체성의 표지로 소비된다.

이것은 진보가 다수의 지지를 얻기 어렵게 만드는 아이러니한 조건이 되기도 한다.


4. 권력으로서의 진보


진보 정당이 권력을 잡았을 때, 진보는 이상에서 실제가 된다.

이때 드러나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진보는 종종 행정과 기술관료주의에 갇힌다.

다른 하나는, 진보는 자신을 재정의할 기회를 잃는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민주화 이후 진보 정당이 정치의 주류로 들어오면서, 운동권의 언어가 행정 언어로 전환되었고, 많은 부분에서 진보적 이상은 기획서의 항목으로 축소되었다.

반면 이를 비판하는 반동은 더욱 선명하고 강하게 목소리를 높이게 되었다.


진보가 권력을 쥐면, 오히려 보수는 ‘피해자’의 프레임을 만들 수 있는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되고, 이로 인해 진보는 자신의 실수를 방어하는 데 더 많은 정치적 에너지를 소모하게 된다.


5. 진보는 여전히 유효한가?


그렇다면 오늘날 진보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진보는 분명, 하나의 방향이자 이상이다. 그러나 이 이상은 비판과 성찰의 언어 없이 지속될 수 없다.


진보가 계속해서 살아있으려면,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는 누구의 이름으로 말하고 있는가?

우리가 만든 제도는 누구에게 혜택을 주고, 누구를 배제하고 있는가?

우리가 말하는 변화는, 누구에게 위협인가?


진보는 권력이 되려는 순간에 스스로를 감시해야 하며, 언제나 자기 해체의 용기를 품어야 한다.

그럴 때 진보는 단순한 이념이 아니라, 끊임없는 재구성의 과정이자, 정치 그 자체가 될 수 있다.



4장. 광장과 골목, 진보가 움직인 시간들

– 역사적 사례를 통해 본 권력과 진보의 접점


1. 1968, 파리에서 세계로


“상상력에 권력을!”

1968년, 파리의 대학가에서 시작된 소요는 곧 전 세계의 청년과 지식인을 흔들었다.

학생과 노동자가 연대하며 외친 구호는 ‘진보’라는 이름에 다시금 급진성과 공동체성을 부여했다.

다만, 그 거대한 에너지는 제도 정치로 온전히 수렴되지 못했다. 프랑스 드골 정부는 흔들렸지만 무너지지 않았고, 이후 사회당의 제도화된 진보는 68세대의 이상을 완전히 담아내지 못했다.


68년은 이상이 현실과 충돌한 장면이었으며, 그 이후의 진보가 제도 안에서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는지를 묻는 출발점이 되었다.


2. ‘촛불의 밤’, 한국 민주주의의 광장

– 진보는 어떻게 거리에 나왔는가


2016년 겨울, 서울 광장은 촛불로 가득 찼다.

무력한 듯 보였던 시민들은 자발적 연대와 평화의 에너지로 대통령을 탄핵시켰고, 새로운 정부를 세웠다.

그 순간, ‘진보’는 특정 진영이 아닌 시민 모두의 말과 행동으로 체현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광장의 진보’는 관료주의와 제도화의 관성 속에서 갈라졌다.

광장에서의 급진적 상상은 입법과 행정에서는 타협과 지연의 언어로 바뀌었다.

이것은 단지 정치권력의 문제가 아니라, 진보 자체의 자기 이해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3. 아랍의 봄, 변화의 역설

– 자유를 외쳤던 혁명의 시간


2010년,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은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외치는 새로운 시대의 물꼬를 틀 것처럼 보였다.

그 에너지는 이집트, 리비아, 시리아로 번졌고, 젊은 세대는 디지털 시대의 저항 모델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그러나 그 이후는 진보의 역설을 드러냈다.

민주주의를 갈망했던 사회는 종파 갈등, 외세 개입, 권력 공백의 혼란 속에서 오히려 더 억압적인 체제로 회귀하기도 했다.


진보는 이상만으로 지속되지 않으며, 변화 이후를 설계하지 못한 권력 교체는 오히려 더 깊은 불안정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4. 진보의 또 다른 이름, 페미니즘

– 거리에서 시작된 대중정치


21세기 초, 진보의 핵심 화두 중 하나는 페미니즘이었다.

특히 #MeToo 운동은 전 세계적으로 권력과 성폭력의 관계를 폭로했고, 개인의 경험이 집단의 정치로 전환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진보 내에서조차 젠더 이슈는 분열의 기제가 되기도 했다.

진보가 추구해 온 보편성과, 페미니즘이 제기한 특수한 억압의 경험이 충돌했기 때문이다.


이는 진보가 단일한 정체성이 아닌, 다층적 해방의 연합체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였다.


5. 홍콩, 소멸과 저항 사이

– 진보는 언제 ‘사라지는 자유’를 말할 수 있는가


2019년, 홍콩의 거리에서 울려 퍼진 외침은 단순한 지역 갈등이 아니었다.

그것은 ‘표현의 자유’, ‘자치의 권리’, ‘시민의 존엄’을 지키려는 마지막 저항의 목소리였다.


비록 그 운동은 강력한 국가권력 앞에 물리적 실패를 맞았지만, 그 안에는 진보가 무엇을 지키려 싸워야 하는가에 대한 강한 윤리적 요청이 담겨 있었다.


진보는 ‘이룰 수 있는 것’만이 아니라, 때로는 지켜야만 하는 최소한의 것들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홍콩은 말해주었다.



5장. 진보 이후, 다시 묻는 상상

– 상징의 퇴색과 말의 재구성


1. 진보의 언어는 왜 식상해졌는가

– 반복된 외침, 닳아버린 단어들


‘변화’, ‘평등’, ‘연대’. 진보를 대표하던 단어들이 이제는 낡고 피로하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한때 혁신과 대안을 담았던 구호들이, 제도권 정치의 틀에 갇혀 기계적인 레토릭으로 반복되면서

그 감동은 점점 옅어졌다.


진보가 ‘권력을 잡은 이후’에도 여전히 변화를 외칠 수 있는가?

이는 단지 말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진정성과 자기반성 능력에 관한 본질적 질문이다.

진보의 언어는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한다.

이념이 아니라, 삶의 감각과 시대의 구체성에서 재탄생해야 한다.


2. 진보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 상상보다 더 시급한 것들


진보는 본래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는 힘’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 상상 이전에 지켜야 할 최소한의 것들이 무너지고 있다.

기후 위기, 노동의 불안정, 혐오의 일상화, 표현의 위축.


이것은 진보가 더 이상 ‘먼 미래’를 이야기하기 전에, 당장의 위기와 공포에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현실적 요청이다.

진보는 꿈꾸는 능력만큼, 상처받은 세계를 감싸는 능력도 요구받는다.

그리고 이것은, 더디고 세심한 윤리의 정치 없이는 불가능하다.


3. 진보를 ‘비판’하는 진보

– 분열이 아니라 자정의 에너지로

오늘날 진보의 위기는 외부보다 내부에서 더 크게 발생한다.

정체성과 세대, 지역과 계층의 간극은 진보 진영 안에서도 날카로운 균열을 낳았다.

이념적 순수성의 경쟁, 도덕적 우위의 주장, 내부 검열과 소모적 논쟁.


그러나 이 모든 균열을 소모로만 볼 것인가, 아니면 ‘자정의 에너지’로 볼 수 있는가?

진보가 스스로를 끊임없이 비판하는 전통을 이어간다면,

그 분열조차도 새로운 감수성과 연대의 가능성을 열 수 있다.

진보는 자기 정체를 거듭 묻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재정의되는 운동이다.


4. 정치가 상상력을 회복하려면

_– 감각, 감정, 그리고 일상으로부터


지금의 정치 담론은 대부분 추상적이고 양극화된 언어로 가득하다.

그러나 진보는 삶의 가장 작은 결핍과 불편, 곁의 이웃과의 대화에서 출발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는 감정과 감각, 일상의 언어로 다시 말해져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시민이 다시 정치를 ‘자신의 일’로 느끼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진보는 더 이상 대의명분이나 거대담론이 아니다.

작지만 구체적인 장면들 - 학교 급식의 질, 동네 도서관의 접근성, 청년의 주거권, 장애인의 이동권 - 에서 시작하는 실천적 언어로 거듭나야 한다.



6장. 미래의 진보, 재설계의 정치

– 새로운 구조, 전략, 감수성


1. 진보의 틀을 다시 짠다는 것

– 낡은 축조물, 새로운 건축


진보는 오래도록 "좌파-우파", "진보-보수"라는 낡은 도식 속에서 규정돼 왔다.

하지만 이 이분법은 이제 복잡한 세계의 모순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

기후 위기와 플랫폼 자본주의, 팬데믹 이후의 불안정성, 데이터 권력과 디지털 감시 같은 문제는

기존 정치의 언어와 구조로는 더 이상 해결되지 않는다.


‘재설계’란, 이 낡은 틀을 해체하고 전혀 다른 기준에서 진보를 다시 짓는 작업이다.

이제 진보는 구조적 대응 능력, 기술과 윤리의 통합, 삶의 질에 대한 통찰로 옮겨가야 한다.


2. 전략 없는 도덕은 약하다

_– 이상이 살아남기 위한 조건


진보는 때때로 윤리적 선함에만 의존해 왔다.

하지만 도덕만으로는 권력의 게임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

이상은 반드시 정교한 전략과 구조적 설계 위에서 작동해야 한다.


가령, 기후 정의를 외치는 것과 동시에 탄소세의 수혜를 사회적 약자에게 돌리는 정책 설계,

젠더 평등을 말하면서도 현실 정치의 대표성 구조를 바꾸는 방법이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진보는 원칙과 기술, 이상과 실행을 연결할 수 있는 정치를 만들어야 한다.


3. 미래 진보의 감수성

_– 공감, 유연성, 느림의 윤리


미래의 진보는 더 이상 영웅적인 ‘선도자’가 아니다.

대신, 경청하는 리더십, 공감의 정치, 느림의 전략이 필요하다.

지금 이 시대는 빠르고 강한 것이 아니라, 복잡한 것을 천천히 이해하고, 유연하게 대응하는 힘을 요구한다.


이 감수성은 기존의 계급 중심 진보와도 다르고,

문화만을 강조하는 진보주의와도 다르다.

삶의 불안과 감정의 균열을 읽어내는 새로운 정치적 감수성이,

진보를 다시 사람들 곁으로 불러낼 것이다.


4. 진보가 만들어야 할 공동체

_– 분산된 권력과 연결의 기술


진보는 더 이상 중앙집중적인 권력 설계로는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미래의 공동체는 자율적이고 분산된 참여 구조,

그리고 다양한 삶의 조건들을 인정하는 유연한 공동체성을 요구한다.


플랫폼 노동자, 돌봄 제공자, 이주민, 퀴어 공동체 등,

기존 정치의 언어로 설명되지 않던 삶들을 진보가 껴안지 못한다면,

그 이름은 더 이상 ‘진보’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연결의 기술, 그리고 협력과 공존의 재정치화를 필요로 한다.


5. 진보의 미래를 묻는 다섯 개의 질문

진보는 이제 ‘국가’를 중심에 둘 수 있는가?


기술을 어떻게 진보적 윤리와 연결할 수 있을까?


감정과 불안을 수용하는 정치는 가능한가?


권력을 나누는 구조는 어떤 형태여야 하는가?


‘느림’, ‘작음’, ‘공존’은 새로운 가치가 될 수 있는가?



7장. 진보의 실패들, 그리고 남겨진 가능성

– 파리 코뮌에서 촛불까지, 유토피아의 재구성


1. 실패한 혁명들은 어디로 갔는가

– 불가능한 꿈의 잔해 위에서


역사 속 진보의 시도들은 종종 실패로 귀결됐다.

파리 코뮌, 1917년 러시아 혁명, 1968년 5월의 프랑스,

그리고 한국의 1987년 6월 항쟁, 2016년 촛불 혁명까지.

이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질서를 흔들었고, 새 시대를 향한 도약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 혁명의 뒤안길에는 늘 혼란, 왜곡, 또는 정권 교체 이후의 좌절이 자리했다.

꿈은 선명했지만, 그 꿈을 지속시킬 제도와 감정의 구조는 종종 미완으로 남았다.


2. 파리 코뮌, 너무 이른 이상

– 최초의 실험, 너무 짧은 계절


1871년 파리 코뮌은 노동자 중심의 자치 정부를 시도했다.

이들은 직선제를 시행하고, 교회를 국유화하고, 교육과 여성 해방을 외쳤다.

하지만 너무도 짧은 시간 안에 - 불과 72일 만에 - 진압됐다.


그들의 실패는 폭력 때문만이 아니라,

당시 사회가 감당하지 못한 새로운 권력 구조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이상’이 제도로 자리 잡지 못하면 얼마나 쉽게 사라지는지를 보여준다.


3. 68 혁명과 감정의 정치

– 이성과 체제에 대한 반란


1968년 프랑스의 학생과 노동자들의 연대는

정치 혁명이라기보다는 감정의 해방, 일상의 전복에 가까웠다.

그들은 ‘지루한 삶’, ‘획일적 체제’에 대한 거부를 외쳤고,

“상상력이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슬로건은 이후 수십 년 간 진보적 문화의 심층을 형성했다.


하지만 체제를 바꾸지는 못했다.

오히려 이후의 정치적 보수화 속에서

이 혁명은 문화적 감수성의 변화만 남기고 퇴장했다.


4. 한국의 촛불, 그 후

– 혁명인가, 리셋인가


2016년 대한민국의 촛불은

수많은 시민이 광장에 모여 정권을 바꾸는 평화적 혁명을 이뤄낸 드문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의 변화는 기대보다 더디고 제한적이었다.


왜일까?

혁명은 있었지만, 정치 구조를 바꾸는 깊은 진보적 설계는 미완이었다.

기득권을 재구성하거나, 감정의 불균형을 제도화하는 시도는 충분치 않았다.

진보는 권력 교체 이후의 일상적 재건 능력에서 자주 약해진다.


5. 실패가 남긴 것들

– 사라지지 않은 씨앗들


그러나 이 실패들이 모두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혁명은 구조를 남기지 못했지만,

감정의 기억, 상상력의 흔적, 연결의 언어는 남아 있다.


파리 코뮌은 이후의 자치운동에 영감을 주었고,

68 혁명은 오늘날의 ‘느림의 정치’나 ‘감정적 진보’의 기원이 되었으며,

촛불은 여전히 많은 시민에게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실천적 기억으로 남아 있다.



8장. 미래를 설계하는 진보

– 기술, 감정, 공동체를 다시 연결하는 상상력


1. 진보는 더 이상 낡은 미래를 원하지 않는다

– 미래라는 말이 피로해진 시대


한때 ‘미래’는 진보의 전유물처럼 보였다.

과학 기술의 진보, 민주주의의 확장, 복지국가의 이상…

모두가 내일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AI의 자동화, 기후 붕괴, 디지털 권력의 집중,

그리고 상상조차 어려운 탈노동 사회의 그림자 속에서

‘미래’라는 단어는 점점 불안과 두려움의 아이콘이 되었다.


진보는 이 지점에서 중대한 질문에 직면한다.

우리는 어떤 미래를 원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미래를 누구와 어떻게 만들 것인가?


2. 기술과 윤리, 동맹을 맺을 수 있을까

– 프로그래밍된 세계에서 인간다움은 어떻게 살아남는가


기술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AI는 언어를 배우고, 판단을 내리고, 창작까지 시도한다.

플랫폼은 일상을 구조화하며, 감정조차 알고리즘 화한다.


하지만 기술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문제는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 기술이 누구의 손에 의해, 어떤 방향으로 설계되는가다.


진보는 기술에 대한 반사적 거부가 아니라,

기술과 윤리가 공존하는 조건을 적극 설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기술자와 철학자, 정치가와 예술가의 공동 작업이 필요하다.


인간의 존엄을 내장한 알고리즘

공공성과 투명성을 지닌 데이터 시스템

감정 노동자를 보호하는 플랫폼 윤리


이 모두는 기술을 통해 보다 정의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길로 연결될 수 있다.


3. 감정의 미래, 공동체의 감각

– 피로사회 이후, 우리는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우리는 지금 ‘감정의 위기’를 살고 있다.

불안, 고립, 자기 비난, 사회적 무기력…

이 감정들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 자체로 정치적, 구조적 감정이다.


진보는 이제 감정의 정치학을 회피할 수 없다.

기존의 계급이나 정체성 기반의 운동만으로는

이 거대한 ‘감정의 단절’을 다 감싸지 못한다.


우리가 다시 서로를 이해하고 연결될 수 있으려면,


공감이 작동하는 제도적 언어


휴식과 돌봄이 가능한 사회적 리듬


공동체적 서사와 축제의 복원이 필요하다.


이 감정의 재구성 없이는

아무리 진보적 제도를 설계해도 그 속에 살 사람들의 마음이 따라오지 않는다.


4. 탈성장, 그리고 충분한 삶

– 무한한 팽창 대신 깊은 삶의 설계


기후 위기는 우리에게 말한다.

이제 ‘더 크고, 더 빠르고, 더 많은 것’은 해답이 될 수 없다.


진보는 새로운 경제 언어를 필요로 한다.


‘성장률’이 아닌 삶의 질

GDP가 아닌 공동체의 지속가능성

‘경쟁력’보다 관계력


이러한 전환은 단순한 정책의 변화가 아니라,

삶을 이해하는 감각의 전환,

그리고 욕망의 재배치를 요구한다.


진보는 이제 덜 갖는 삶,

하지만 더 충만한 삶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미래 사회에서 유일하게 ‘성장’ 가능한 가치일지도 모른다.


5. 미래는 사유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짓는’ 것이다

– 정치의 재구성, 상상의 재조립


진보의 마지막 과제는

‘정치를 다시 상상하는 능력’이다.

정치는 갈등의 조정이자, 공동체의 방향 제시이며,

무엇보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실천이다.


미래의 진보는


공공과 사적 삶의 경계를 재조정하고

참여와 숙의의 기술을 재발명하며

시민성과 연대의 언어를 더 섬세하게 다듬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정치’와 ‘기술’,

‘감정’과 ‘제도’,

‘개인’과 ‘공동체’를 새로운 배열로 엮어야 한다.


미래는 그 자체로 주어지지 않는다.

미래는 우리가 함께 짓는 구조물이다.



9장. 실험하는 공동체, 그리고 미래의 씨앗들

– ‘가능성의 정치’를 실현하는 사람들


1. 모색하는 도시들

– 사회 혁신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세계 곳곳에서, 기존 제도 바깥에서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실험이 자라고 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데시마 공동체’는

주거 위기를 겪는 이들을 위해 시민이 직접 만든 자율적 공유 공간이다.

단순한 쉼터를 넘어서,

그들은 식량 자립, 공동 보육, 수평적 의사결정 구조를 실험한다.


서울의 ‘성미산 마을’은

거대 도시 속에서 돌봄과 교육, 생태와 경제가

자율적으로 연결된 생활 공동체를 20여 년간 유지해 왔다.

가치의 우선순위를 바꾸면

도시도 충분히 진보의 실험장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다.


이러한 공간들은

‘정책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서의 시민을 전면에 내세운다.

진보는 더 이상 거대한 이념보다

생활 속에서 구현되는 작지만 지속 가능한 실천에 주목해야 한다.


2. 기본소득 실험과 ‘경제의 윤리화’

– 불확실성 시대의 인간 존엄을 위한 기획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2017~2018)은

당장의 경제 성과보다 삶의 질과 심리적 안정감에 초점을 맞췄다.

결과는 놀라웠다.

수혜자들의 정신 건강이 향상되고,

노동시장 참여가 줄지 않았으며,

삶에 대한 주체적 통제감이 증가했다.


이 실험은 진보에게 묻는다.

“인간다운 삶의 조건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조건이 시장과 성장률의 논리로 환원되지 않을 수 있는가?


기본소득은 단지 돈을 주는 정책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기본값’을 재설계하는 정치적 선언이다.


진보는 이러한 실험들을

‘재정 논리’로만 논박할 것이 아니라,

삶의 존엄과 사회적 신뢰를 재구성하는 시도로 다뤄야 한다.


3. 기후 시민의회와 새로운 민주주의

– 대표성과 숙의의 접점을 찾아서


프랑스는 2019년, 대통령 직속으로

‘기후 시민의회(Convention Citoyenne pour le Climat)’를 출범시켰다.

무작위로 추출된 시민 150명이 9개월간 숙의하며

기후위기 대응 정책을 설계했다.

그들이 내놓은 149개의 제안 중 146개는 정부의 정식 채택 논의로 이어졌다.


이 실험은 묻는다.

우리는 시민을 얼마나 신뢰하는가?

정치는 과연 대리와 위임만으로 충분한가?


기후와 같은 복잡하고 장기적인 문제일수록

다양한 삶의 경험을 지닌 시민들의 참여와 공감이 중요하다.

진보는 이제

‘숙의 민주주의’라는 도구를 통해 시민과 제도 간의 단절을 회복해야 한다.


4. 공동체 돌봄과 감정의 재구성

– 보이지 않는 노동을 다시 중심으로


팬데믹은 ‘돌봄’의 중요성을 드러냈다.

그동안 시장 바깥, 통계 바깥에 있던 수많은 노동이

사회 유지의 핵심임이 확인되었다.


독일의 ‘케어 코먼즈(Care Commons)’ 실험은

돌봄을 개인 책임이나 가족 윤리로 환원하지 않고,

사회적 인프라로 재배치하는 시도다.

주거, 보육, 요양이

공동체 단위에서 관리되는 이 실험은

감정 노동과 생애 주기의 리듬이 정치적 의제로 진입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진보는 이제

‘복지’나 ‘공공서비스’의 프레임을 넘어

‘돌봄의 정치’를 설계해야 한다.

이는 곧 감정의 정치이자,

관계의 정의를 재구성하는 실천이다.


5. 연대의 재발명

– 차이를 연결하는 기술, 공감의 구조 만들기


이제 진보는 더 이상

“누구를 위한 진보인가?”라는 질문에

하나의 정체성으로만 답할 수 없다.


이주민, 비정규직, 청년, 장애인, 성소수자…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이들 사이의 가교를 만드는 기술이 필요하다.

그 기술은 정체성의 순혈주의나 경쟁이 아니라,

차이 속에서 공감과 공동 목표를 세우는 능력에서 나온다.


독일의 난민-노동자 연대

칠레의 여성 노동자와 환경운동의 교차

한국 청년 세대의 ‘기후-불평등’ 공동행동


이러한 실험은

진보가 단지 ‘정의의 언어’에 머물지 않고,

상상력과 관계력의 언어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마무리: 씨앗은 이미 여기 있다

진보는 먼 곳에 있지 않다.

새로운 사상은 기존 질서의 틈새에서,

새로운 정치는 일상적 실천의 층위에서,

이미 잎사귀처럼 자라고 있는 중이다.


이 장에서 소개한 사례들은 모두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불완전하다.

그러나 그 불완전성 속에

진보의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고 있다.


에필로그: 진보라는 이름의 마지막 질문

이 책의 여정은 진보라는 단어에 담긴 여러 의미와 그 변화를 추적하는 과정이었다.

우리는 과거의 진보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그것이 어떻게 권력과 긴장 속에서 변형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진보는 단지 사회적 변화를 위한 이념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을 뛰어넘는 상상력, 사회적 연대를 위한 지속적인 실천, 그리고 미래를 위한 정치적 요구로서 존재한다.


책을 마무리하며,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다시 던져야 한다.

진보는 과연 끝났는가? 아니면 아직도 우리 앞에 펼쳐진, 미지의 여정인가?


우리가 진보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이 단지 경제적 성장이나 정치적 권력의 재분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계속해서 강조했다.

진보는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는 집단적 상상력이다.

이 상상력은 과거의 이념적 한계와 실패 속에서도 여전히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살아있다.


오늘날의 진보는 단지 과거의 유산이 아니다.

그것은 불평등과 기후 변화, 기술 발전과 민주주의 위기 등 현대 사회가 직면한 새로운 문제들에 대한 응답으로서,

새로운 사고와 실천을 요구하는 시대적 과제이다.


우리는 권력과 진보가 서로 상반되는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긴장 속에서 상호작용하며 존재한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살펴보았다.

진보는 권력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권력과 대면하고 조화롭게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진보는 단지 미래를 향한 대답이 아니라, 그 과정을 살아내는 끊임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진보가 과거의 낡은 이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현실에 맞는 방식으로 다시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기후 위기, 사회적 불평등, 디지털 시대의 권력 문제 등, 현대의 복잡한 문제는

진보의 새로운 정의를 요구하며, 이는 우리 각자의 실천 속에서 일어날 것이다.


따라서 진보는 이제 단지 책 속에서만 논의되는 주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 선택, 그리고 행동 속에 녹아들어, 새로운 사회적 형태를 만들어가는 실천적 요구로 자리 잡는다.


진보를 다시 묻고, 그 가능성을 찾는 여정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우리는 여전히 변화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 책이 진보의 끝이 아니라 시작을 안내하는 하나의 지침서가 되었기를 바라며,

진보라는 이름의 질문은 이제 독자들에게로 넘어간다.


우리는 진보를, 다시,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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