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민일기(2020년 9월 1일 흐림)
우민은 "코로나19는 하나님의 심판"이란 취지의 설교를 한 인천의 한 목사님께서 코로나19에 감염됐다는 뉴스를 접하고 상념에 빠졌다. 문득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이다"라고 말한 크레타인의 역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둘은 매우 닮았다. '코로나19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주장은 거짓으로 판명됐다. 목사 스스로 코로나19에 감염됨으로써 그 반례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라는 주장도 거짓으로 판명되고 만다. 그 주장을 한 사람이 바로 크레타인이기 때문이다.
물론 둘의 차이는 존재한다. 전자는 구체적 현실에서 시간차를 두고 발생한 반어적 상황이다. 후자는 추상 차원에서 발생한 논리적 모순 상황이다. 보통 전자를 아이러니라고 하고 후자를 패러독스라고 한다.
아이러니와 패러독스의 차이에 대해 많은 사람이 헷갈려한다. 우민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지만 나름의 기준을 만들어봤다. 아이러니는 시간차를 두고 발생하며 그걸 인지하는 순간 웃음이나 슬픔, 연민 같은 감정적 여운을 동반한다. 반면 패러독스는 (지적으로 훈련된 사람의 경우) 그 논리적 모순관계가 단숨에 파악되지만 감정적으론 멍한 상황이 발생한다. 당황, 곤혹, 낭패에 가깝다.
아이러니가 극적이라면 패러독스는 논리적이다. 그래서 문학은 아이러니를 더 선호한다. 하지만 그 둘이 묘하게 뒤섞여 웃음이 나긴 하는데 멍해지는 묘한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우민이 최근 읽은 '이스탄불 이스탄불'이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에피소드였다.
맨발에 거지꼴을 한 수도승이 마을에 나타났다. 성벽 그늘에서 쉬는 그에게 잠자리와 먹을 것을 제공하겠다는 주민들이 나타났다. 그는 이를 정중히 사양하면서 "제가 예언자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분이 계시다면 그분의 손님이 되겠다"라고 했다. 하루가 지나도 그를 예언자로 믿는 사람이 안 나서자 수도승은 말했다. "제 등 뒤의 저 벽이 말을 하게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사람들이 웃으며 그러겠다고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그러자 수도승은 벽을 보고 말했다. "이봐 벽, 저 사람들에게 내가 예언자라고 말해주게나." 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로 벽을 쳐다봤다. 한참 후 벽이 진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언자가 아니에요."
자, 당신이 마을 사람이라면 그 수도승을 어떻게 대접해주겠는가?
#우민은 제멋대로 지어 본 제 별호입니다. 제 본명이 한자로 '현명한 재상'이란 거창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반대로 그저 '또 하나의 백성(又民)'일 뿐이며 '어리석은 백성(愚民)'이자 '근심하는 백성(憂民)'에 불과하다는 뜻을 담아지어 봤습니다. '우민일기'는 제 글이 전지적 작가 시점에 가까운 '맨스 플레인'이 많다는 생각에 제 자신을 3인칭으로 객관화하려는 글쓰기 시도입니다. 또 제가 결론을 끌어내기보다는 여러분의 참여를 끌어내는 질문을 던지는데 더 치중하려고 합니다. 많은 응답과 질정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