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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우민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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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소아 Dec 30. 2020

설민석과 변창흠

12월 30일 많이 추움

설민석은 그래도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깨끗이 물러났다. 하지만 변창흠은 말의 성찬에 불과한 사과만 되풀이할 뿐 물러나는 모습은 끝까지 보여주지 않았다. 일국의 장관이 학원 강사 출신 방송인보다 못한 책임윤리를 지녔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우민은 생각했다.     


변창흠 개인보다 더 문제는 문재인 정부다. 청문회라는 제도의 존재이유는 뭘까. 고위공직에 취임할 때 대통령에게 인사권을 주지만 그 사람 됨됨이에 대해선 야당이 아니라 국민의 눈높이를 통과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변창흠은 거기에 한참을 못 미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별 문제가 아니라며 장관 임명을 강행했다. 청문회의 존재이유 그리고 공직자에 대한 국민의 윤리적 눈높이를 무시한 것이요, 국가가 사회의 합리적 견제를 거부한 것이다.     


올해 번역 출간된 대런 애쓰모글루와 제임스 로빈슨의 '좁은 회랑'은 국가(State)와 사회(Society)가 어떻게 공존하느냐에 따라 국민의 자유가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국가가 사회를 압도해서도 안 되고, 사회의 관행이 너무 압도적이라 국가의 출현을 막아서도 안 된다. 시대적 변화에 발맞춰 그 둘의 이인삼각 달리기가 제대로 이뤄질 때 비로소 국민의 자유가 확보된다. 문제는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그런 성공적 사례가 ‘좁은 회랑’ 안에서만 이뤄졌다는 점이다.     


애쓰모글루와 로빈슨은 토마스 홉스가 만인 대 만인의 투쟁 상태를 종식시키기 위한 필요악으로 설정한 국가를 지칭하는 리바이어던의 존재양태를 3가지로 분류했다. 국가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해도 제 역할을 못하는 ‘부재하는 리바이어던(Absent Leviathan)’과 아무런 견제 없이 정부가 폭주하는 ‘독재적 리바이어던(Despotic Levianthan)’, 마지막으로 사회와 국가가 건강한 길항 관계에 놓인 ‘족쇄 찬 리바이어던(Shackled Leviathan)’이다.      


링크한 사진 속 그래프에서 x축은 사회의 힘을, y축은 리바이어던의 힘을 보여준다. x축으로 기울어진 나라는 리바이어던의 힘이 약하고, y축으로 기울어진 나라는 사회의 힘이 약하다고 보면 된다. 전자에 해당하는 나라가 아프리카의 국가들이라면 후자에 해당하는 대표적 나라가 중국과 러시아다. 그럼 그 사이 기울기 45도를 중심으로 분포하는 나라들이 양자의 힘이 균형을 이루는 ‘좁은 회랑’에 속한 나라가 된다.     


애쓰모글루와 로빈슨은 한국어판 서문에서 코로나 19 방역에 성공한 한국과 실패한 미국을 비교하며 한국이 그 좁은 회랑 안에 속한 나라라고 말한다. 맞다. 한국은 역사적으로나 지리학적으로 매우 드물게도 그 좁은 회랑 안에 속하게 된 나라다. 문제는 좁은 회랑 안에 들어갔다고 해서 그것이 항상 유지된다는 것이 아니다. 저자들은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세상이 계속 움직이기 때문에 쉬지 않고 열심히 뛰어야 세상에 뒤처지지 않는 레드퀸의 사례를 들며 이를 레드퀸 효과라고 부른다. 국가와 사회가 저마다 열심히 달리면서 서로를 필사적으로 견제해야 좁은 회랑에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1987년 민주화 이후 리바이어던에 족쇄를 채우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 시절 리바이어던이 이 족쇄를 깨고 독재적 리바이어던의 길을 가려했다. 그러자 사회가 나서 촛불을 들고 이를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사회가 국가의 독주를 막아낸 것이다. 미국의 경우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경우처럼 사회가 리바이어던의 족쇄를 느슨하게 할 경우 리바이어던의 폭주를 피할 수 없다. 다행히 이번 대선에서 그 거칠게 날뛰던 녀석의 발목에 다시 족쇄를 채우는 데 성공했다.     


족쇄를 채우는데 성공했다고 안심하면 안 된다. 레드퀸 효과를 떠올려야 한다. 국가는 필요악이지만 잠시라도 방치하면 언제든 폭주를 꿈꾸기 때문이다. 사회 역시 열심히 달리면서 계속 견제와 균형의 채찍질이 필요하다.   

   

박근혜 탄핵의 결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 역시 마찬가지라고 우민은 생각한다. 조국과 추미애 사태에서 드러나듯 문재인 정부라는 리바이어던 역시 사회적 견제를 벗어나 마음껏 질주하고픈 본능을 숨기지 않는다. 그래서 선출된 권력이 최고라면서 절차적 민주주의와 삼권분립이란 족쇄를 부수려고 든다. 청문회라는 존재이유를 무력화시키면서 대통령이 한번 “고”를 외쳤으면 무조건 “고”하는 것이 국민(그들의 뇌리 속엔 이미 신민)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전형적인 왕당파적 발상이다. 문재인이란 촛불의 영웅과 그 황태자인 조국의 순수성과 완결성을 더럽히려는 자들이야말로 적폐라고 공격하는 것이다.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엄청난 힘을 지닌 리바이어던의 목덜미에 걸터앉은 사람들이다. 과거 그 리바이어던을 견제하기 위해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싸웠던 그 사람들이 더 이상 아닌 것이다.

     

그들은 한때 자신들이 정의로운 검사의 표본이라고 칭송하며 검찰총장에 임명했던 윤석열을 절차적 민주주의를 무시하고 쳐내려고 온갖 무리수를 둔다. 사회적 눈높이에 한창 미치지 못하는 변창흠의 장관 임명을 강행한다. 국가의 가부장이라 여기는 대통령의 심기를 거스르는 존재는 한때 정의로웠는지 몰라도 지금은 악의 화신이라고 공격한다. 반대로 한때 갑질을 좀 했더라도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하는 자라면 하자가 없다고 억지를 편다.

      

우민은 그런 문재인 정부에게서 ‘반지의 제왕’의 절대반지의 유혹에 넘어가 초심을 잃어버린 무수한 인물 군상을 떠올린다. 다시 국가의 독주가 시작되려 한다. 깨어있는 공화파라면 문파들의 영웅놀이에 취해 있지 말고 리바이어던의 족쇄를 더욱 단단히 죄어야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이 어렵게 들어선 좁은 회랑에서 미끄러져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래야 문재인 정부가 ‘20년 집권’이란 절대반지의 유혹을 과감히 던져버릴 수 있고 박근혜 정부의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우민은 제멋대로 지어 본 제 별호입니다. 제 본명이 한자로 '현명한 재상'이란 거창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반대로 그저 '또 하나의 백성(又民)'일 뿐이며 '어리석은 백성(愚民)'이자 '근심하는 백성(憂民)'에 불과하다는 뜻을 담아 지어 봤습니다. '우민일기'는 제 글이 전지적 작가 시점에 가까운 '맨스플레인'이 많다는 생각에 제 자신을 3인칭으로 객관화하려는 글쓰기 시도입니다. 제가 결론을 끌어내기보다는 여러분의 참여를 끌어내는 질문을 던지는데 더 치중하려고 합니다. 많은 응답과 질정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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