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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소아 Jan 18. 2021

고슴도치의 삶, 여우의 삶

2021년 1월 18일

  세상의 지식인은 고슴도치형과 여우형이 있다고 갈파한 것은 20세기 영국의 정치사상가 이사야 벌린이다. 그는 자신의 책 ‘고슴도치와 여우’에서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하나의 큰 것을 알고 있다”는 고대 그리스의 시인 아르킬로코스의 발언을 인용하며 이 같은 이분법을 도입했다. 꾀 많은 여우가 우직한 고슴도치를 못 이기는 것을 보고 쓴 표현이다. 따라서 많은 이들은 이를 고슴도치 중심으로 받아 들여왔다. 느려도 우직한 거북이가 빠르고 영리한 토끼를 이긴다는 ‘토끼와 거북이’ 동화의 변주로 받아들인 셈이다.     


  벌린은 이런 통념에 도전했다. 고슴도치와 여우를 등가의 존재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고슴도치형 인간은 세상만사를 일이관지하는 단 하나의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 진리는 보편적이고 일원적이며 본질적인 그래서 창천의 태양처럼 단 하나뿐인 것이다. 반면 여우형 인간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변화무쌍한 정보를 호기심으로 계속 수집하는 사람이다. 그 정보는 가변적이고 다원적이며 현상적인 그래서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그 무엇이다.     


  우민은 어린 시절 고슴도치형의 인간이 되고 싶었다. 그가 배우고 따르고 싶었던 성인군자는 결코 여유형의 인간이 아니라 고슴도치형의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부처건 공자건 예수건 무함마드건 소크라테스건 그들은 하나의 위대한 진리를 통해 도탄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고자 한 존재 아니었던가. 또 선가의 종사들처럼 오로지 하나뿐인 필생의 화두에 집중해 그 하나를 깨달아 만사형통의 지혜의 문을 연 사람들 아니었던가.     


  문제는 우민은 결코 고슴도치형 인간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날 때부터 호기심이 많고 그래서 궁금한 것도 많아 중구난방 정보와 지식을 끌어 모으는 스타일이지 결코 묵묵히 하나의 원대한 지혜를 좇는 스타일이 못됐다. 그래서 ‘언젠가 고슴도치가 될 것을 꿈꾸는 여우’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무하며 살아왔다.      


  벌린의 ‘고슴도치와 여우’는 그런 우민에게 희망을 안겨줬다. 사람들이 고슴도치라고 생각하는 톨스토이의 대표작 ‘전쟁과 평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톨스토이가 내면적으론 여우에 가까웠음을 설파했다. 대하소설인 ‘전쟁과 평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서로 다른 세계관을 지닌 인물들인데 톨스토이는 그들의 장단점을 비교 분석하고 그 한계와 모순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이는 단일한 인간관과 세계관을 지닌 고슴도치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여러 갈래의 길을 끊임없이 훔쳐보고 상상하는 여우였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천하의 톨스토이와 벌린 또한 그러한데 우민 따위야 말해 무엇하랴.     


 그래서 우민은 언젠가는 자신을 사로잡을 하나의 화두를 만난 것이란 기대로 세상의 본질과 인간의 진리를 추구한 책들을 읽었다. 철학과 종교, 양자역학과 뇌과학을 다룬 책들이었다. 그 책 속의 주인공의 절반 이상은 이 우주 어느 곳에서나 보편적이고 일원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고슴도치형 인간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그런 진리를 손에 쥐었다거나 거의 품에 넣었다고 알려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발견하고 증명한 것은 보편이니 본질이니 일원이니 절대니 하는 것과 거리가 있었다.      


  물리학 세계에서 결코 쪼개지지 않는 최소 입자인 원자의 예를 들어보자. 고대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가 추론과 상상에 입각해 말한 아톰이라는 것이 18세기 돌튼에 의해 이론화됐을 때 많은 고슴도치들은 무릎을 쳤다. 데모크리토스야말로 고슴도치의 모범이로구나. 하지만 연구가 더 진행되면서 원자는 양성자 중성자 전자라는 더 작은 입자로 나뉘고 다시 이들 입자 역시 소립자라는 더 작은 입자로 나뉜다는 것이 발견됐다. 지금까지 발견된 그 소립자의 종류는 300종이나 된다.      


  그 300종의 소립자를 성질에 따라 2종류로 나눌 순 있다. 쿼크와 렙톤 또는 페르미온과 보손이다. 하지만 그 둘은 결코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다. 우주에 존재하는 힘 역시 하나가 아니라 넷이다.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이다. 심지어 우리가 존재하는 우주와 우리 자신도 하나가 아닐 수 있다. 여러 차원의 다중우주와 그 속에서 분기되는 여러 종류의 내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언제나 여우보다 고슴도치의 힘이 세다. 사람들은 단순하고 단일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생존에 유리하기도 하다. 그리스 철학의 진정한 비조로 꼽히는 이가 일원론자인 파르메니데스인 것도 그리고 그를 계승해 이원론적 일원론인 이데아론 펼친 플라톤이 서양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진리와 윤리 그리고 미의 담보자인 신은 유일한 존재라는 기독교사상이 서구 사상계를 제패했던 것 역시 유일사상이 그만큼 매력적이기 때문 아니었을까.      


  심지어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무수히 해체하고 재구성해온 물리학에서도 그런 고슴도치의 힘은 유감없이 과시되고 있다. 우주의 입자와 힘을 단 하나의 원리로 설명할 수 있는 슈퍼 울트라 캡짱 이론으로서 ‘초끈이론’이 아인슈타인을 필두로 그토록 많은 물리학자들을 유혹하고 이유다. 만물을 단 하나의 원리로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의 유혹은 그만큼 유구하고도 막강하다.      


  그렇지만 우민의 생각은 바뀌었다. 고슴도치가 되기를 포기하고 그냥 여우로 살기로 했다. 고등학교 때 배운 지극한 진과 지극한 선과 지극한 미는 하나로 통한다는 것이 환상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는 진리가 아니라 직관에 불과함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범주의 것이 하나로 합치되는 순간은 선물처럼, 밤하늘의 별똥별처럼 아주 드물 게 발생한다. 그것을 영구불변하게 고정시키려는 순간 인간세상의 모든 비극이 발생한다. 진선미를 하나로 묶으려는 순간 늘 배제와 소외와 폭력이 발생하고 유혈이 낭자해진다.      


  고슴도치는 그런 유혈을 부수적 피해라고 생각한다. 여우는 다르다. 생명 하나하나가 곧 우주라고 믿는다. 그래서 단 하나의 우주를 파괴하는 것도 꺼려한다. 그래서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사막의 여우처럼 존재와 존재 간의 관계 중심적 삶을 선택한다. 여우에겐 우연히 선물처럼 주어진 어린 왕자와의 우정이 중요하다. 고슴도치가 꿈꾸는 불명의 명성 따위는 이솝우화 속 신포도처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래서 우민도 여우처럼 ‘지금’과 ‘여기’ 그리고 자신에게 곁을 내준 특별한 존재를 중시하며 살기로 했다. 다만 특별한 관계를 맺은 아주 소수의 고슴도치와의 추억만큼은 여전히 가슴 깊이 품은 채.



 #우민은 제멋대로 지어 본 제 별호입니다. 제 본명이 한자로 '현명한 재상'이란 거창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반대로 그저 '또 하나의 백성(又民)'일 뿐이며 '어리석은 백성(愚民)'이자 '근심하는 백성(憂民)'에 불과하다는 뜻을 담아 지어 봤습니다. '우민일기'는 제 글이 전지적 작가 시점에 가까운 '맨스플레인'이 많다는 생각에 제 자신을 3인칭으로 객관화하려는 글쓰기 시도입니다. 제가 결론을 끌어내기보다는 여러분의 참여를 끌어내는 질문을 던지는데 더 치중하려고 합니다. 많은 응답과 질정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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