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편 위령공(衛靈公) 제1장
위령공이 공자에게 군대의 진법에 대해 물었다. 공자가 대답했다. “제사 지낼 때 제기 놓는 예법에 관해선 일찍이 들은 바가 있지만은 군사를 다루는 병법에 대해서는 배운 적이 없습니다.” 그러고는 다음날 마침내 떠났다.
衛靈公問陳於孔子. 孔子對曰: “俎豆之事, 則嘗聞之矣. 軍旅之事. 未之學也.” 明日遂行.
위영공문진어공자 공자대왈 조두지사 즉상문지의 군려지사 미지학야 명일수행
이 장면은 훗날 맹자가 앙혜왕을 만났을 때 폼 나게 변주됩니다. 양혜왕이 맹자를 초빙하고 “우리나라에 무슨 이익을 안겨주실 수 있겠소?”라고 첫 질문을 던지자 “어찌 인의(仁義)에 대해 묻지 않고 이익에 대해서 물으십니까?”라며 면박을 주는 그 장면 말입니다. 맹자는 분명 ‘논어’의 이 장면을 염두에 두고 앙혜왕과 대화를 펼쳤음에 분명합니다. ‘공자님 하늘에서 잘 보고 계시죠?’라고 윙크까지 보내면서.
맹자는 공자의 군자학을 고도의 윤리학으로 전환시킨 불멸의 사상가입니다. 하지만 정작 인간 심리에 대해서는 공자보다 한참 하수였음에 분명합니다. 위령공과 대화 뒤에 숨겨진 공자의 깊은 좌절감과 아득한 절망감을 체득하지 못한 채 그 껍데기만 흉내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맹자가 면박을 준 양혜왕은 전국 7웅 중 하나로 꼽히는 강대국 위(魏)나라의 위풍당당한 군주였습니다. 반면 공자에게 실망감을 안겨준 위령공은 춘추시대에도 노나라와 엇비슷한 약소국의 제후였습니다. 그 위(衛)나라는 공자가 천하주유에 나섰을 때 첫 방문국이자 또한 14년 뒤 노나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까지 머문 나라이기도했습니다.
공자가 처음에 위나라에 갔을 때는 그 제자이면서 자로의 처형이었던 안탁추(顔濁鄒)의 집에 10개월이나 머물며 탐색전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결국 공자의 존재가 부담스러웠던 위나라 대부들의 참소로 도망치듯 떠나야 했습니다. 그 후 다시 몇 개월 뒤 두 번째 방문에서는 앞서 얘기한 위나라의 대부 거백옥의 집에 거처를 마련하며 좀 더 본격적인 구직활동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위령공의 부인인 남자(南子)와 공자가 독대한 일로 스캔들이 터지고 위령공 부부가 공자를 예에 맞지 않게 대우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설상가상으로 힘겹게 만난 위령공은 공자가 이상으로 삼은 예치(禮治)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전쟁기술에만 관심을 보입니다. 절망한 공자는 바로 위나라를 떠나 그보다 더 약소국인 진나라와 채나라로 떠나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진과 채에서도 등용되지 못합니다. 마지막 카드로 당시 중원에 끼어주지도 않던 변방국가 초나라의 초빙에까지 응했지만 그 역시 무산되고 맙니다. 그래서 결국 베이스 기지나 다름없었던 위나라로 다시 돌아와 은거하게 됩니다. 이 세 번째 방문에서는 위령공이 죽고 그의 손자인 위출공(희첩)이 재위에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 공자의 후원자는 위출공이 아니라 공어(孔圉‧중숙어 또는 공문자로도 불림)였던 것 같습니다. 공자가 위나라 외교를 잘 이끈 명신으로 칭찬한 공어는 위출공 시대엔 경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공자에게 정치적 자문을 구했고,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가려 할 때 만류했다는 내용이 사마천의 ‘사기’에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공자는 왜 그렇게 위나라를 빙빙 맴돈 것일까요? 그 단초는 ‘논어’에 등장하는 “노나라와 위나라의 정치는 형제와 같다”라는 공자의 발언(13편 ‘자로’ 제7장)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합니다. 공자는 왜 그런 발언을 한 것일까요? 여기엔 깊은 연원이 있습니다.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통일왕조를 이룩한 주무왕(희발)에겐 10명가량의 동생이 있었는데 모두 제후로 봉해졌습니다. 바로 아랫 동생이 관숙 희선(관나라 시조)이고 둘째 동생이 주공 희단(노나라의 시조)이었습니다. 관숙은 주공보다 동생인 채숙 희탁(채나라 시조)과 곽숙 희처(곽나라 시조)과 함께 제후국의 하나가 된 은나라를 감시하는 역할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이들 삼형제를 '삼감(三監)'이라고 불렀습니다.
문제는 무왕이 대업을 이루고 3년 만에 숨지면서 발생했습니다. 무왕의 아들(희송)이 등극해 성왕이 됐으나 나이가 너무 어려서 둘째 동생이지만 주나라의 제도와 문물을 확립한 주공이 섭정을 맡게 됩니다. 주공의 형인 관숙을 필두로 한 삼감은 주공이 왕위를 찬탈하는 것 아니냐 의심했고 급기야 자신들의 감시 대상인 은나라 제후 무경(은나라 주왕의 아들)과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주나라 건국 초 최대 위기였으니 주공이 제나라 제후로 봉한 강상(강태공)과 손을 잡고 이를 제압하는데 무려 3년이나 걸렸습니다.
반란을 제압한 주공은 반란의 수괴인 무경뿐 아니라 형인 관숙까지 처형하고, 채숙은 유배 보내고. 곽숙은 삭탈관직하는 과감한 처단을 감행했습니다. 이어 은나라를 남쪽의 송(宋)과 북쪽의 위(衛) 둘로 쪼개고 송의 제후로 은나라 왕족인 미자 계(자계)를 삼고, 위의 제후로는 무왕의 동생 중 끝에서 두 번째인 강숙 희봉을 삼았습니다. 특히 위나라는 국호를 ‘지킬 위’로 삼은 것 자체가 혹시 재발할지 모를 은나라 유민 세력의 반란으로부터 주나라를 지키라는 뜻이 담긴 거였습니다.
주공 희단은 본디 노나라의 제후로 봉해졌기에 노나라와 위나라는 그 혈통상 형제국가였습니다. 게다가 노나라는 주나라의 제도와 문물의 원형을 간직한 나라라면 위나라는 주나라를 내란으로부터 지켜내야 하는 나라라는 점에서도 그 역할을 형제라 부를만합니다. 여기까지는 긍정적 의미입니다.
다음은 부정적 의미입니다. 춘추시대 초기만 해도 위상이 높았던 두 나라는 제(齊) 진(晉) 초(楚) 오(吳) 같은 강대국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를 면키 어려운 약소국으로 전락했습니다. 게다가 두 나라 모두 제후의 부인이 처가 식구와 불륜에 빠져 정국이 혼미해졌다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노나라의 경우 노환공의 부인으로 제나라에서 시집 온 문강이 결혼 전부터 배다른 오빠인 제양공과 근친상간을 저질러 온 것이 들통이 납니다. 이로 인해 노환공이 시해되고 문강의 친아들인 노장공이 재위를 이어받으면서 정통성 논란에 시달리다 결국 노나라를 골병 들게 만든 삼환정치를 배태하게 됩니다.
위나라의 경우 위령공의 부인으로 송나라에서 시집온 남자가 송나라에서부터 불륜관계였다고 의심받은 미남자 송조(宋朝)를 위나라로 불러들이면서 일대 스캔들이 발생합니다. 위령공의 전부인 소생인 태자 희괴외가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새어머니 남자를 죽이려다 불발에 그치자 진(晉)나라로 망명하게 되고 위령공이 죽은 뒤 재위가 괴외의 아들인 희첩에게 승계되니 그가 위출공(衛出公)입니다. 망명지에서 절치부심하던 아비 괴외는 몰래 국내 잠입한 뒤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아들인 위출공을 쫓아내고 제후의 자리에 오르니 그가 곧 위장공(衛莊公)입니다. 결국 국모의 치정극이 부자간 골육상쟁으로까지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 빌미를 제공한 장본인이 바로 위령공입니다. 그는 남자의 미모에 혹해 그녀의 애인 소리를 듣는 송조를 불러다가 위나라의 대부를 시켰으니 오쟁이 진 남편이 따로 없던 셈입니다. 한데 설상가상으로 위령공의 동성애 성향 때문이라는 추문까지 더해집니다. 위령공이 미소년 출신의 미자하를 총애해서 부인이 송조와 바람피우는 것을 일부러 묵인했다는 입방아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제후가 남색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니 그 부인 또한 미남자와 바람이 났다는 더블 스캔들이 터진 것입니다.
공자는 노나라에서 이루지 못한 자신의 꿈을 그 형제국이나 다름없는 위나라에서 실현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노나라가 주나라의 영혼을 간직한 나라라면 위나라는 그 뼈대가 되는 나라라 상상했을 직합니다. 노나라 다음으로 공자의 제자를 많이 배출한 나라가 위나라였기에 인맥이 풍부했던 점도 크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위나라에서 공자가 목도한 것은 노나라 정치를 혼돈에 몰아넣었던 패륜 드라마의 시즌 2였습니다. 이번엔 제후 부인뿐 아니라 제후 자신도 막장드라마를 찍고 있었으니까요. 점입가경이라고 제후의 아들은 한술 더 떴으니 자신에게 모욕감을 줬다는 이유로 새어머니를 모살하려 했던 것으로도 모자라 아들의 권좌까지 찬탈하며 막장의 끝판왕을 보여주게 됩니다. 결국 그 막장드라마의 마지막 희생양이 공자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자로였으니 공자가 얼마나 기가 막혔을지 짐작이 가십니까?
그 막장극의 씨앗을 뿌린 남자와 위령공을 모두 만나 본 공자는 어쩌면 그 결말을 예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위령공이 병법에 대해 묻자 이를 빌미로 기다렸다는 듯이 짐을 싸서 떠난 것 아닌가 합니다. 사실 공자가 일국의 재상이 되고자 했다면 아무리 문덕(文德)의 정치를 지향한다고 해도 당연히 안보 문제에 대한 해법도 갖춰야 마땅합니다. 구체적 전술은 아니더라도 어떤 전략으로 대처하고 어떤 사람을 장수로 쓸 것인지에 대한 큰 그림을 제시해줬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나는 예에 대해서만 알뿐”이라며 물러났다는 것은 당시 위나라 상황이 구제불능이라는 판단 아래 깨끗이 손 털고 일어날 명분만 찾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시야를 좀 더 좁혀서 본다면 당시 위나라에는 집정대부로 공숙문자, 외교 전문가로 공어, 의례 전문가로 축타, 군사전문가로 왕손가와 같은 인재가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공자는 그들의 대체제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을 것입니다. 위나라를 완전히 재설계할 청사진을 갖추고 있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위령공은 공자에게 그런 큰 그림을 묻지 않고 당장 벌어질 전쟁에서 이길 방법에 대해 물었던 겁니다.
위령공 부부의 추문을 돌파하고 강대국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된 위나라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선 전권을 맡겨도 될까 말까인데 겨우 진법에 대해서 묻는 것을 보고 만정이 다 떨어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안 그래도 군자전문가인 왕손가가 공자를 찾아와 “위령공 말고 나한테 잘 보여야 한 자리 차지할 수 있느니 먼저 내게 고개를 숙이라”(논어 제3편 ‘팔일’ 제13장)고 텃세를 부리고 갔는데 ‘하필이면 진법이라니?’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위령공과 공자의 대화에는 이렇게 복합한 사연이 농축돼 있습니다. 이를 모른 채 짧은 만남 속의 단편적 대화만 놓고서 도덕주의적 해석을 가하다보니 공자가 현실감각 떨어지는 탁상공론가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문진(問陳)’이란 두 글자 앞에서 공자가 느꼈을 좌절감과 절망감을 체득했더라면 맹자는 양혜왕과 첫 면접에서 면접관의 반감만 불러일으킬 그런 오만한 발언을 늘어놓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위령공이 양혜왕처럼 예를 갖추고 처음 맞이하면서 큰 그림의 질문을 던졌더라면 공자는 면박주기보다는 웅대한 청사진을 펼쳐 보였을 것입니다. 공자는 맹자처럼 똥폼을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무리 약소국이라 하다러다도 진짜 자신의 웅지를 펼칠 수 있는 나라를 만나는 것이 절실했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적으로, 한 번은 희극적으로’라는 마르크스의 말은 여기서도 적용 가능합니다. 공자와 위령공의 대화가 비극적이라면 맹자와 양혜왕의 대화는 희극에 가깝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