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거하긴 부담되고 남 주긴 배 아픈

15편 위령공(衛靈公) 제2장

by 펭소아

진(陳)나라에 머무를 때 식량이 다 떨어져 따르는 사람들이 병들어 일어나지 못했다. 자로가 성이 나서 물었다. “군자도 어쩌지 못할 때가 있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어쩌지 못할 때에도 굳건히 원칙을 지키지만 소인은 함부로 행동한다.”


在陳絶糧, 從者病, 莫能興. 子路慍見曰: “君子亦有窮乎?” 子曰: “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

재진절량 종자병 막능흥 자로온현왈 군자역유궁호 자왈 군자고궁 소인궁사람의



천하주유 기간 공자가 처음 방문한 나라가 위령공이 집권 중이던 위(衛)나라였다면 그다음 목적지는 남쪽의 강대국 초나라와 국경을 접해 그 영향 아래 있었던 진(陳)나라와 채(蔡)나라였습니다. 물론 진나라로 가는 길에 조(曺)나라, 송(宋)나라, 정(鄭)나라 등을 경유하긴 했지만 공자 일행이 목표로 삼은 나라는 진나라와 채나라였으며 각각 3년 안팎이라는 오랜 기간을 머물렀습니다.


그럼 왜 하필 진나라와 채나라였을까요? 당시 두 나라는 남방의 강대국으로 부상한 초나라의 침공에 계속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진나라는 공자의 방문 전에 초나라에 정복됐다가 복국(復國)되기를 2차례 반복했고, 결국 공자가 죽고 1년 뒤인 기원전 478년 초나라에 흡수 통일됩니다. 채나라 역시 초나라의 침공에 시달리며 제후(채령공)와 세자가 모두 살해되는 참극까지 겪으며 1차례 망국과 복국의 설움을 겪습니다. 이후 초나라의 라이벌로 급부상한 신흥강대국 오나라에 빌붙어 생존을 도모하다 초나라에 미운털이 박히자 신하들이 제후(채소공)를 시해하는 일까지 벌입니다. 그러다 결국 진나라 멸망 33년 뒤인 기원전 445년 역시 초나라에 의해 멸망됩니다. 공자는 그렇게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두 나라에서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펼치려 한 것입니다.

하지만 진나라도 채나라도 머뭇머뭇하다 결국 공자를 기용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심지어 두 나라의 제후가 공자를 만나줬다는 기록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마천의 ‘공자세가’에 따르면 위나라에서는 공자가 노나라에서 하대부를 맡던 시절 녹봉에 해당하는 좁쌀(粟) 6만 되를 지급받았다는데 진나라와 채나라에서는 그에 한참 미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논어’에는 진나라에 머물던 시절 관련 에피소드가 3개 등장하는데 모두 풍찬노숙의 힘겨움과 노나라에 대한 향수병에 대한 내용입니다.


진나라는 주나라 무왕 때 순(舜)임금의 후손인 규만(嬀滿)에게 봉분된 공국(公國)입니다. 하(夏)나라의 시조 우(禹)임금의 후예를 찾아 후국(侯國)으로 봉분한 기(杞)나라, 은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의 삼촌 내지 배다른 형인 미자 자계(子啓)에게 공국(公國)으로 봉분된 송(宋)나라와 더불어 주나라 초기 높은 위상을 누리던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춘추시대에 접어들면서 약소국으로 전락했고 초나라에 의해 3차례나 멸망당하고 직할 현이 설치되는 멸국치현(滅國置縣)의 오욕을 겪게 됩니다. 그 진나라 최후의 제후가 진민공(陳閔公‧재위 기원전 501년~기원전 478년)입니다. 그는 당시 끊임없이 간만 보다가 결국 공자를 만나주지도 않은 바로 그 제후였습니다.


진민공은 노나라로 돌아간 공자가 숨진 기원전 479년 초나라에 내전이 발생하자 초나라를 침공하는 무리수를 둡니다. 이는 생전 공자가 높이 평가한 초나라 섭공(채나라 땅이었다가 초나라에 편입된 섭 지역을 다스린 심제량‧沈諸梁)이 내전을 급수습함에 따라 다음 해 대대적 반격을 초래합니다. 결국 진민공은 살해되고 진나라의 종묘사직은 영원히 불타버리게 됩니다. 채나라 역시 33년 뒤 초나라에 의해 멸망당하는데 섭공 심제량이 기원전 506년 채나라에 의해 멸망당한 심(沈)나라 마지막 세자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결국 초나라가 대신 복수를 해준 셈이 됩니다.


진민공은 공자를 기용하지 않은 것에 멈추지 않고 후반기에는 몹시 박대한 듯합니다. 식량까지 끊어서 공자를 따르던 제자들이 기아선상에 시달리게 만들었으니까요. 이에 대해서는 진나라에 이어 채나라에서도 외면받은 공자가 초나라 소왕(昭王‧재위 기원전 515~기원전 489)의 부름을 받고 초나라로 가려하자 진과 채의 대부들이 이를 막기 위해 공자 일행을 포위하고 식량공급을 차단해 벌어진 일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내거 하긴 부담되지만 남 주기는 더 싫다”는 심보가 따로 없었던 겁니다. 어느 쪽이건 공자 일행이 진나라로부터 푸대접을 받았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당시 성미 급한 자로가 갑갑한 마음에 어깃장을 놓습니다. 차마 대놓고 스승 탓을 할 수는 없으니까 스승이 이상으로 삼은 군자를 걸고넘어진 것입니다. “지혜롭고 어진 군자도 곤궁한 일을 당할 때가 있느냐?”고 꼬집은 것입니다. 공자는 의연하게 답합니다. “군자도 인간인 이상 그런 일을 피할 순 없다. 다만 소인은 그런 일을 당하면 지켜야 할 선을 넘는 게 다반사이지만 군자는 결코 선을 넘지 않는다.”


자, 그럼 공자일행은 과연 이 곤란함을 어떻게 극복했을까요? ‘공자세가’는 자공이 포위망을 뚫고 초소왕에게 구원을 요청해 초나라 군대가 도착해 위기를 벗어났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군대까지 보내 공자를 초빙해 700리의 땅을 다스리게 하려던 초소왕이 초나라 영윤(집정대부) 자서(子西‧초소왕의 서형인 미신)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공자를 기용하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맙니다. 이를 감안하면 초나라에서 군대를 보낸 것이 아니라 공자의 초빙 자체를 취소함에 따라 포위가 풀렸을 공산이 더 커보입니다.


어쨌든 공자는 자신의 원칙을 굽혀서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그 명성을 더럽히지 않은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장은 '견위수명(見危授命‧위기를 보면 목숨을 바친다)'을 삶의 모토로 삼았던 자로조차 견디기 힘든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공자는 끝까지 금도를 지켰다는 것으로 새기는 것으로 충분할 듯합니다.

keyword
펭소아 도서 분야 크리에이터 프로필
팔로워 132
매거진의 이전글모든 것을 꿰뚫는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