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편헌문(憲問)제42장
자로가 군자에 대해 물었다. 공자가 말했다. “자신을 수양해 경건해지는 것이다”
자로가 말했다. “단지 그뿐입니까?”
공자가 말했다. “자신을 수양해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다.”
자로가 말했다. “단지 그뿐입니까?”
공자가 말했다. “자신을 수양해 백성을 평안하게 해주는 것이다. 자신을 수양하여 백성을 평안하게 해주는 것은 요임금과 순임금조차도 벅차게 여겼을 것이니라.”
子路問君子. 子曰: “修己以敬.”
자로문군자 자왈 수기이경
曰: “如斯而已乎?”
왈 여사이이호
曰: “修己以安人.”
왈 수기이안인
曰: “如斯而已乎?”
왈 여사이이호
曰: “修己以安百姓. 修己以安百姓, 堯舜其猶病諸.”
왈 수기이안백성 수기이안백성 요순기유병저
공자의 군자학(君子學)은 투 트랙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하나는 수제학(修齊學)이고 다른 하나는 치평학(治平學)입니다. 전자는 자기수양을 통해 자신 안에 더 많은 타인을 수용하는 덕을 함양하는 것입니다. 후자는 그런 타인과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의 이치인 도를 터득하는 것입니다. 그 둘을 접목시키는 개념이 어짊(仁)이고 그걸 현실에서 실천하는 인물이 군자(君子)입니다.
공자의 수자제인 자로가 이를 몰랐을 리 없습니다. 그런데 정색하고 스승에게 묻습니다. 도대체 군자가 뭐하는 사람이냐고. 첫 질문부터 까칠합니다. 보통 이에 대한 모범답안은 수기치인(修己治人)입니다. 수제와 치평을 하나로 묶은 개념입니다. 그런데 공자는 치평 얘기는 쏙 빼놓고 “수기이경(修己以敬)하는 사람”이라고 답합니다. “경건한 자세로 자신을 수양하는 것”이란 뜻도 되고 “자신을 수양해 경건해지는 것”이란 뜻도 됩니다. 자로의 관심이 치평에 치중돼 있어 수제를 소홀히 한다는 생각에서 역으로 치고 들어간 겁니다.
그러자 자로가 다시 범상치 않게 받아칩니다. “그거만 하면 정말 군자가 되는 겁니까?” 의심 가득한 질문입니다. 움찔한 공자가 ‘수기치인’을 살짝 비틀어 ‘수기안인(修己安人)’이라는 추가 설명을 답니다. 자신을 수양해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란 뜻입니다. 여기서 안(安)은 안보와 평화, 복지를 두루 아우르니 군자가 추구하는 인의 두 가지 트랙을 모두 거명한 것입니다. 하지만 자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정말 그게 다냐?”라고 묻습니다. 거의 “거기에 당신 손모가지를 걸 수 있어?”라고 겁박하는 분위기입니다.
공자의 혓바닥이 좀 더 길어집니다. ‘수기안인’을 살짝 변형한 ‘수기안백성’을 두 번 반복하며 요임금과 순임금을 거명합니다. 요순은 군자의 완성형인 성인의 대명사입니다. 그런 두 사람조차 그 경지에 이르려 안달복달하다 겨우 도달할까 말까 했는데 그걸 어찌 그리 쉽게 말하느냐고 오금을 박아버린 겁니다. “나는 군자 됨의 깊이를 말하였는데 너는 어찌 군자 됨의 조건을 나열하라고 하느냐?”고 죽비를 내려친 겁니다.
저는 자로를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와 자주 비견합니다. 이 장면은 “내일 새벽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라는 예언대로 예수가 로마군에 붙잡혀간 뒤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를 떠올리게 합니다. 공자 가르침의 핵심인 군자와 그 덕목인 어짊에 대해 3차례나 회의를 표명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린 베드로는 예수의 가르침을 여생동안 실천하다가 스승과 같은 형극의 길을 따라갑니다. 그것도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서. 자로 역시 스승의 마지막 일격에 정신을 번쩍 차렸고 일흔 다 된 나이에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하다가 장렬히 산화합니다. 수제자, 그거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