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문학과 예는 한 세트

14편헌문(憲問)제41장

by 펭소아

공자가 말했다. “윗사람이 예를 좋아하면 백성을 부리기 쉽다.”


子曰: “上好禮則民易使也.”

자왈 상호례즉민이사야



‘윗사람이 예(禮)를 좋아한다’는 말은 예에 입각한 정치를 펼친다는 뜻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예는 번거롭고 꾸미는 것이란 인식이 강합니다. 그에 대한 거부감이 담긴 표현이 ‘번문욕례(繁文縟禮)’입니다. 직역하면 ‘복잡한 글과 번거로운 예’라는 뜻입니다. 왜 글과 예가 한 세트가 되어서 묶였을까요?


오늘날에는 ‘의전(儀典)’이란 표현으로 축소됐지만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에는 정치와 행정의 절반 이상이 예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국가적 의례가 치러질 때뿐 아니라 일상적 조례(朝禮)에서도 왕과 공경대부는 예에 입각해 말하고 행동해야 했습니다. 이로부터 벗어나는 비례(非禮)와 무례(無禮)는 단순히 감정적 문제에 그치지 않고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할 뿐 아니라 전쟁의 빌미까지 주는 문제가 돼버렸습니다.


그래서 예를 전담하는 관료를 따로 뒀습니다. 이를 사(史)라고 불렀습니다. 사가 되려면 각종 의례에 정통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그 의례의 기원에 정통해야 했기에 자연스럽게 역사를 잘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가 역사를 뜻하는 단어가 된 것입니다. 또 사는 제문(祭文)을 잘 쓸 줄 알아야 했기에 글재주가 좋아야 했습니다. 글을 잘 쓰려면 글을 많이 읽어야 했습니다.


사가 되려고 공부하는 사람들을 유(儒)라고 불렀고, 둘을 하나로 묶어서 유사(儒史)라고 불렀으니 공자가 바로 유사였습니다. 그래서 훗날 공자의 가르침을 유학(儒學)이라 부르고 그를 공부하는 사람을 유생(儒生)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유학자들이 사서와 경서를 많이 읽고 글쓰기로 실력을 겨루게 된 것 역시 여기서 연유합니다. 그렇게 禮를 통해 史와 儒와 文이 한 세트로 엮이게 된 것입니다.


곰곰이 따져보면 예는 처음엔 국가행사를 치를 때 신분고하에 따른 행동준칙을 적어둔 매뉴얼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다 오랜 세월이 켜켜이 쌓이면서 상징이 되고, 전통이 되고, 표준이 되면서 엄청난 권위가 더해집니다. 그래서 그 예를 따르느냐 따르지 않느냐가 국가적 질서와 결속의 시금석이 됩니다. 춘추시대에 접어들면서 그 의례의 원천이었던 주(周) 왕실의 권위가 무너지면서 그 시금석이 빛을 잃어갔습니다. 그때 공자가 등장해 주나라 초기 ‘예의 복원’과 ‘문덕(文德)의 부활’을 주창하고 나선 것입니다. ‘禮=史=儒=文’의 전통이 그 원천에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윗사람의 호덕이 왜 백성을 부리기 쉬운 것과 연결될까요? 백성이라면 누구나 번문욕례를 싫어할 텐데 말이죠. 예는 질서와 조화를 중시합니다. 그래서 군대에서 병사들을 훈련시킬 때 오와 열을 맞추게 하는 효과를 백성들에게 발생시킵니다. 또 계급 차이에 따른 역할 분담이 뚜렷하게 이뤄지는 효과를 발휘합니다. 법은 백성에게 이를 엄격하게 강제하지만 예는 물이 스며들 듯 백성을 변화시킵니다.


게다가 법은 백성이 꼭 알아야 하지만 예는 백성이 몰라도 됩니다. 윗사람만이 잘 알고 솔선수범해 보이면 백성은 자연스럽게 따라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공자가 생각한 예치(禮治)의 본질이 여기에 있습니다. 복잡하고 번잡한 번문욕례가 아니라 오랜 전통에 기초하고 그래서 그 나라 백성이면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지상의 척도, 그것이 곧 예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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