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편 선진(先進) 제24장
자로가 자고를 비읍의 읍재로 삼았다.
공자가 말했다. “남의 자식을 망치는구나.”
자로가 말했다. “백성도 있고, 사직도 있는데 어찌 꼭 책을 읽어야만 학문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이래서 내가 그럴듯하게 말을 꾸며내는 사람을 싫어하는 거다.”
子路使子羔爲費宰.
자로사자고위비재
子曰: “賊夫人之子.”
자왈 적부인지자
子路曰: “有民人焉, 有社稷焉, 何必讀書然後爲學?”
자로왈 유민인언 유사직언 하필독서연후위학
子曰: “是故惡夫佞者.”
자왈 시고오부녕자
자로가 자고를 비읍의 읍재로 삼았다.
공자가 말했다. “남의 자식을 망치는구나.”
자로가 말했다. “백성도 있고, 사직도 있는데 어찌 꼭 책을 읽어야만 학문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이래서 내가 그럴듯하게 말을 꾸며내는 사람을 싫어하는 거다.”
자고(子羔)는 성이 고(高), 이름이 시(柴)인 공자 제자입니다. 노나라 사람으로 자(字)가 자고(子羔) 또는 계고(季羔)였습니다. 나이가 공자보다 30세 연하였다는 설(‘중니제자열전’)과 40세 연하였다는 설(‘공자가어’)이 엇갈립니다. 자로가 자고를 계손씨의 식읍인 비읍의 읍재로 삼았다면 자로가 계손씨의 가재로 있던 기원전 498년 전후일 것입니다. 40세 연하라면 이때 자고의 나이는 10대 중반밖에 안됩니다. 따라서 30세 연하였다는 기록이 더 신뢰할 만 합니다.
그에 따르면 자고는 중궁, 염구, 자공, 안연과 동년배인 제(弟) 계열 제자입니다. 그렇지만 ‘논어’에서 그의 위상은 그들에 한참 못 미칩니다. 키가 5척이 못될 정도의 단구였다고 하는데 공문의 대사형인 자로는 그런 그를 몹시도 귀여워해 반평생 후견인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고는 자로의 주변을 맴도는 위성 같은 존재로 등장합니다. 자로가 노나라 실세인 계손씨 가문의 가재를 할 때는 비읍의 읍재를 맡았고, 자로가 위나라 집정대부 공회의 읍재를 맡았을 때도 그 밑에서 일했습니다.
자로와 달리 공자는 그런 자고를 탐탁지 않게 여겼습니다. 자여(증자)는 노둔하다고 할 때 자고에 대해선 어리석다고 일갈했습니다(11편 ‘선진’ 제17장). 또 이 장에선 학문이 여물지 않았음에도 너무 빨리 출사한다고 경계했습니다. 자로는 “배움이 꼭 책에만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백성을 다스리고 사직에 제사를 올리는 현장에서도 배울 수 있는 것 아니냐”며 자고를 두둔했습니다.
말은 자로의 말이 옳습니다. 배움의 길이 꼭 책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공자가 말하고자 한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자고가 군자학의 요체를 터득하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빨리 감투 맛을 보게 되면 벼슬자리에 너무 연연하게 될 것을 걱정한 것입니다. 자로가 정무적 판단력은 남달랐지만 사람 보는 눈은 공자에 미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 사람이라 생각한 자고를 무작정 옹호하고 나선 겁니다.
공자는 그런 자로를 비판하면서 ‘녕자(佞者)’란 표현을 썼습니다. 대다수 공자 주석서는 이를 ‘말 잘하는 자’로 새깁니다. 하지만 이는 공자의 본뜻과 부합하지 않습니다. 佞의 본뜻은 ‘아부한다’입니다. 그로부터 아부하기 위해 그럴듯하게 말을 잘 꾸며낸다는 뜻이 파생됐습니다. 공자가 가장 싫어한 것은 실체와 그에 대한 명칭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나라의 재상이 되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하겠느냐는 자로의 질문에 대해 “반드시 이름(명분)부터 바로 잡겠다(必也正名乎)”고 답한 것입니다(13편 ‘자로’ 제3장). 아부를 잘하는 사람들은 사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이런 명실상부한 상태를 교란, 왜곡, 파괴합니다. 그래야 잘 못된 것을 잘한 것으로 둔갑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감안하면 ‘녕자’를 단순히 말 잘하는 사람, 언변이 좋은 사람으로 새겨서는 안 됩니다. 사심을 채우려는 목적에 말로 실체를 왜곡하는 사랍니다. 공자가 “남의 자식을 망치는구나”라고 말한 것은 자고가 아직 그만한 그릇이 못 된다는 뜻입니다. 헌데 자로는 당장 자신을 도울 사람을 채우려는 욕심에 그 본질은 외면한 채 “부족한 점은 일하면서 배우면 된다”라는 핑계를 갖다 붙인 겁니다. 공자가 보기에 이는 자로가 제 욕심을 채우기 급급하면서 마치 자고를 위하는 척하는 것이니 명실상부하지 못한 것이라고 질책한 것입니다.
공자의 안목이 옳았다는 점은 훗날 여실히 입증됩니다. 위나라에서 정변이 발생했을 때 자로가 평생의 소신인 견위수명(見危授命)을 실천하가 위해 단기필마로 적진으로 뛰어들 때 그전까지 늘 자로 뒤를 쫓아다니던 자고는 줄행랑을 치고 맙니다. ‘중니제자열전’에 따르면 위나라에서 정변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접한 공자는 “아이쿠, 시(자고)는 살아 돌아오겠지만 유(자로)는 죽었겠구나!”라며 이를 내다봤다고 합니다.
자고가 진정한 군자였다면 자로를 끝까지 설득하다 안 되면 자로와 운명을 같이 하겠다고 나섰어야 합니다. 그랬다면 자로가 사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돌아섰을 지 모릅니다. 하지만 자고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 자기 목숨 하나 건지겠다고 자로를 버리고 도주했습니다. 군자는커녕 약삭빠른 구실아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 것입니다. 자로가 그리 아껴주고 돌봐준 것이 결국 공자의 말처럼 ‘남의 자식을 망치는 일’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자고를 ‘공문 72현’에 포함시키는 것에 반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