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과 가신의 차이

11편 선진(先進) 제23장

by 펭소아

계자연이 물었다. “중유와 염구는 대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저는 무언가 다른 것을 물으실 줄 알았는데 중유와 염구에 대해 물으시는군요. 대신으로 불리려면 도로써 임금을 모셔야 하며 그것이 불가하다면 바로 물러나야 합니다. 유와 구는 (대신감은 못되고) 그럭저럭 신하 구실은 한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에 불과합니다."

계자연이 말했다. “그러면 시키는 말을 잘 따를까요?”

공자가 말했다. “아버지와 임금을 시해하는 일이라면 결코 따르지 않을 겁니다.”


季子然問: “仲由冉求, 可爲大臣與?”

계자연문 중유염구 가위대신여

子曰: “吾以子爲異之問, 曾由與求之問. 所謂大臣者, 以道事君, 不可則止. 今由與求也, 可謂具臣矣.”

자왈 오이자위이지문 증유여구지문 소위대신자 이도사군 불가즉지 금유여구야 가위구신의

曰: “然則從之者與?”

왈 연즉종지자여

子曰: “弑父與君, 亦不從也.”

자왈 시부여군 역불종야



계자연(季子然)은 노나라의 실세였던 계손씨 가문의 일원입니다. 계평자의 아들이자 계환자의 동생, 계강자의 삼촌이 되는 인물로 추정됩니다. 공자와 동년배이거나 좀 더 어릴 수 있습니다.


공자의 제자 중에서 계손 씨 가문의 가재(家宰)가 됐다고 알려진 인물이 셋입니다. 자로(중유), 염유(염구), 중궁(염옹)입니다. 중궁이 가재로 활약한 시점은 불분명하지만 자로는 계환자가 종주일 때, 염유는 계강자가 종주일 때 가재가 됐습니다. 따라서 계연자가 저 질문을 던진 시점은 염유가 계강자의 가재가 돼 공을 세운 대가로 공자가 14년에 걸친 외유를 마치고 노나라로 귀국한 이후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 무렵 자로도 전직 가재로서 비공식적으로 염유의 일을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대신이라 하면 나라의 녹을 먹는 높은 벼슬아치를 말합니다. 하지만 자로와 염유는 당시 노나라의 녹을 먹는 신하가 아니라 계손씨 가문의 가신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가신을 두고 대신이라 할 수 있느냐고 묻는 것 자체가 큰 실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공자가 탐탁지 않게 여긴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래서 “그런 걸 질문이라고 들고 왔냐? 너희 가문의 가신밖에 못되는 주제에 언감생심 대신감이 가당키냐 하냐?”는 취지로 받아친 것입니다. 원문의 ‘구신(具臣)’이란 표현은 대신과 대비해 그럭저럭 신하 구실은 할 줄 아는 신하라는 뜻입니다.


5편 공야장 제8장에서 맹손씨 가문의 10대 종주였던 맹무백(맹유자)이 자로, 염유, 공서화의 인물됨에 대해 물을 때 공자의 답변과 상당한 온도 차이가 느껴집니다. 공야장 편에서는 자로가 천승국의 국방장관감, 염유가 백승가문(전차 수백 대를 동원할 수 있는 대부 가문)의 재상감, 공서화가 빈객을 접대할 고위 외교관감은 된다는 것이 공자의 답변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선 자로나 염유 모두 근근이 신하 노릇 못한다는 소리를 면할 정도의 그릇밖에 못된다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계자연이 이를 눈치재지 못했을 리 없습니다. 공자의 삐딱한 답변에 슬쩍 기분이 상해 “그럼 자로와 염유는 고분고분 말은 잘 듣겠네?”라고 반문한 것입니다. ‘대신감이 못되면 시키는 일이나 잘해야 할 녀석들이 왜 자꾸 중뿔나게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 게야?’라는 빈정거림이 숨어있습니다. 계자연의 이런 반응을 보면 첫 번째 질문 자체가 "자로와 염유가 일국의 대신이라도 되는가? 왜 그리 도리에 맞네, 안 맞네를 따지고 드는가?"라는 빈정거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자 공자가 카운터 펀치를 날립니다. “당연하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아비와 임금(제후)을 시해하는 따위의 일엔 결코 동참하지 않을 게야. 그러니 괜히 역모나 모반 비슷한 일에 끌어들일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여러 차례 노나라 제후를 갈아치웠던 계손씨 가문의 아킬레스건까지 건드리면서 "오죽하면 걔들이 너희 말을 안 듣겠냐? 패륜이나 역모에 가까운 일을 지시해서 그런 것 아니겠냐"라고 끽소리도 못 내게 만든 겁니다.


공자가 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로와 염유가 노나라 제후에게 불충한 계손씨 가문의 가재로 들어간 것이 못마땅해서라는 전통적 해석은 과도합니다. 자로가 계환자의 가재로 들어간 것은 공자가 삼환의 식읍 성벽을 허물기 위한 '삼도도괴' 전략의 일환이었습니다. 염유가 계강자의 가재로 들어간 것은 14년간 국외를 떠돌던 공자를 귀국시키기 위한 제자들 방책의 일환이었습니다. 공자가 이를 몰랐을 리 없습니다.


따라서 이 장에서 공자의 불편한 심기는 자로나 염유에 대한 불만 때문이 아닙니다. 계손씨 가문 자체를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도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경대부 가문에 지나지 않으면서 마치 제후나 된 듯 구는 계자연의 언행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름(명분)과 실체(실질)가 부합하도록 하는 것을 정치의 제 1과제로 삼았던 공자의 관점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래도 계손씨 가문이 노나라 최대 실세 가문이었기에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최대한 예를 갖춰 꼬집은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말할 뿐 꾸며내지 않는다’는 술이부작(述而不作) 비판정신의 또 다른 실천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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