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와 팔로어를 가르는 거시기

8편 태백(泰伯) 제9장

by 펭소아

공자가 말했다. “백성은 그것에서 비롯하게 할 순 있어도 그것을 알게 할 수는 없다.”

子曰: “民, 可使由之, 不可使知之.”

자왈 민 가사유지 불가사지지


여기서 백성(民)은 오늘날 민주국가의 국민이 아닙니다. 왕조국가에서 통치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공자가 이상적 리더로 생각한 군자의 다스림을 받는 존재입니다. 불가에서 말하는 중생이요, 예수가 비유적으로 말한 양떼입니다. 그렇기에 현대 민주주의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공자가 국민을 우민으로 취급한 반민주주의자라고 비난하는 것은 허수아비 논법에 불과합니다.

핵심은 두 차례 등장하는 '그것(之)'입니다. 주희를 비롯한 성리학자는 이를 도리(道理)로 받아 ‘백성은 도리를 따르게 할 순 있어도 도리를 깨닫게 할 수 없다"고 풀었습니다. 20세기 고전학자인 양백준은 '사기'에서 서문표가 밝힌 ”백성과 함께 그 성과를 즐거워할 수는 있어도, 처음 시작할 때 함께 논의할 수는 없다(民可以樂成 不可與廬始)”와 같은 맥락으로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백성에게 이로운 정책이라 하더라도 백성 모두를 이해시킨 뒤 시행할 수 없다는 해설입니다.

사실 그것이 뭔지는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공자 이후 등장한 제자백가가 중시한 모든 가치를 그것에 투영할 수 있습니다. 법가라면 법과 제도가 되고, 도가라면 천하의 도가 되고, 묵가라면 박애가 되고, 병가라면 병법이 될 것입니다. 그에 발맞추면 유가에선 예악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자백가를 두루 아우르는 이런 가치의 공통점은 그것을 깨친 소수의 사람이 그렇지 않은 대다수를 이끌거나 지도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어디에서나 소수의 리더(leader)와 다수의 팔로어(follower)를 가르는 그 무엇이 존재합니다. 공자가 예악이나 도라 칭하지 않고 ‘그것’이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한 것도 이를 겨냥해서가 아닐까요? 그것이 무엇이 됐든 그것을 깨치고 운용하는 사람이 치자(治者)가 되고 그것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그에 입각해 살아가는 사람은 피치자가 된다는 원리를 일깨워주기 위한 가르침일 가능성이 큽니다.

사실 이는 현대 민주정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민의 이해와 동의를 구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긴 하지만 그전에 어떤 정치적 사안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것은 그에 대해 정통한 소수 엘리트의 몫일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 민주주의에서도 그렇게 결정된 것을 모든 국민을 이해시키진 않습니다. 국민투표로 가져갈 중대한 사안이라도 선거권을 지닌 국민 중에서도 직접 투표에 나선 사람 중 과반의 그것도 이해가 아니라 동의를 얻으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밝힌 것처럼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통치술의 기초라는 냉철한 통찰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심지어 “거짓말을 하려면 엄청나게 큰 거짓말을 하라”라는 히틀러나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마오쩌둥의 섬뜩한 권력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역사는 그것을 권력의 비의라고 받아들인 사람들이 권좌를 농락한 경우가 더 많음을 고발하고 있지 않나요?

따라서 공자가 말한 그것을 도리나 예악, 법과 제도 같은 이상적 가치로 직결시키려는 것이 오히려 촌스러운 것입니다. 공자가 말한 그대로 ‘그것’ 아니면 한국적 표현의 묘미를 살려 ‘거시기’로 해석하는 것이 더 풍부하고도 미묘한 의미를 부여해줍니다. 요즘 말로 더 쿨한 셈입니다. 공자와 또 그 발언을 기록한 제자들이 굳이 ‘그것’이라고만 한 이유가 그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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