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와 利의 차이가 말해주는 것

4편 이인(里仁) 제16장

by 펭소아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


子曰: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자왈 군자유어의 소인유어리



‘논어’를 대표하는 명문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리학자들은 이 구절을 토대로 의리에 충실한 군자 대 이익을 탐하는 소인이라는 이항대립적 인식만 강화시켰습니다. 그러다 결국 '군자는 선이요, 소인은 악'이라는 도덕주의적 이분법까지 초래했습니다. ‘이익을 탐하는 것은 인욕의 산물임으로 반드시 없애야 천리(의리와 예의)를 보존할 수 있다’는 성리학적 교리가 그것입니다.


제 해석은 다릅니다. 소인은 못난 사람이 아니라 일반적 사람입니다. 일반인은 누구나 자신의 이익에 충실하니 이는 과히 탓할 바가 못 됩니다. 군자도 평범한 소인에서 출발합니다. 대신 도를 익히고, 덕을 쌓아서 자신의 이익 너머에 있는 공동체의 대의를 앞세우게 된 비법한 사람입니다. 견리사의(見利思義)가 바로 이를 표현한 것이며 그 궁극의 경지가 자신을 희생해 어짊을 이루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인 것입니다.


군자는 소인과 전혀 다른 종자가 아닙니다. 소인과 똑같이 이익에 밝지만 그걸 넘어서서 의리에도 밝게 된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군자는 소인의 대척점에 위치한 사람이 아니라 소인 그 이상의 사람으로 봐야 합니다. 소인의 한계를 뛰어넘는 대인(고위공직자)이 되기 위해 특별한 훈련과정을 거친 사람이 공자가 말한 군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장의 가르침은 소인과 군자를 대립적으로 인식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를 이끌고 다스리는 리더가 될 사람이라면 팔로어가 될 사람과 다른 면이 있어야 하는데 그 핵심은 사익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대의명분을 추구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적절히 옮긴 표현이 선공후사(先公後私)라면 도덕주의적 이분법에 침윤된 성리학적 표현이 멸사봉공(滅私奉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자가 소인을 품은 군자의 포용적 자세라면 후자는 소인을 부정하는 군자의 독선적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멸사봉공이 살신성인과 같은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좋은 질문입니다. 살신성인이란 표현은 극단적 한계상황을 전제합니다. 반면 멸사봉공이라는 표현에는 그런 극단적 상황을 일상화하라는 암시가 깔려 있습니다. 다시 말해 멸사봉공에는 살신성인을 일상화하라는 도덕주의적 억압이 작동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멸사봉공의 세계관을 따르다보니 군자는 한없이 지고지순한 존재가 되고 소인은 천박한 시정잡배 취급을 받는 결과를 낳게 된 것입니다. 성리학적 표현을 빌리자면 이야말로 성인의 뜻을 곡해하고 왜곡한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원문의 喩는 본디 ‘옮기다’는 뜻에서 출발해 말(口)을 통해 뭔가를 옮겨놓는다는 의미를 갖게 됐습니다. 그에 따라 알리다, 밝히다, 깨닫게 하다, 비유하다 등등의 뜻이 파생됐습니다. 그에 따라 직역하면 ‘군자는 의리에서 깨달음을 얻고, 소인은 이익에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해 정통하고 해박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에 따라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라고 폭넓게 풀어낸 전통적 해석에 무리가 없다는 생각에 이를 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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