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학이(學而) 제9장
증자가 말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머나먼 것을 추구하면 백성의 덕이 다시 두터워질 것이다.”
曾子曰: “愼終追遠, 民德歸厚矣.”
증자왈 신종추원 민덕귀후의
‘논어’가 그 출전이 된 신종(愼終)과 추원(追遠)은 각각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상례와 조상신에 대한 제사로 그 의미가 굳어졌습니다. 하지만 자여(증자)가 처음 사용할 때는 좀 더 문학적이면서도 포괄적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신종은 반드시 부모의 상례만 뜻하지 않습니다. ‘도덕경’ 제64장에는 “마무리 지을 때 처음처럼 하면 망치는 일이 없다(愼終如始 卽無敗事)”라는 구절이 나옵니다만 여기서 신종은 상례를 뜻하지 않습니다. 또 천자문에도 ‘끝까지 삼가면 참으로 아름답다’는 신종의령(愼終宜令)이라는 표현이 나오지만 역시 상례를 뜻하는 건 아닙니다. 반면 추원은 대개 조상을 추모한다는 뜻으로 새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재실(齋室)의 이름이 추원재(追遠齎) 또는 추원사(追遠祠)인 것도 그에 기원합니다.
자여는 효자의 대명사였습니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신종에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상례, 추원에는 사대 조상까지 모시는 제사라는 뜻이 함의됐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뜻을 포함시키면서도 폭넓은 해석 또한 가능합니다.
신종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한다는 태도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도덕경’의 신종여시와 궤를 같이합니다. 또 추원은 시간적으로 태초, 공간적으로 본향을 그리워하는 노스탤지어의 심성으로 해석 가능합니다. 수구초심(首丘初心)과 공명하는 마음자세입니다. 다른 한편으론 현재의 당면 과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먼 미래에 닥칠 위기상황을 대비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심모원려(深謀遠慮)에 해당하는 마음자세입니다.
누군가 삶을 마무리할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귀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현재에 발이 묶여 사는 사람보다 근원적인 것에 대한 향수를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이 대단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 당장 손에 쥘 수 있는 것만 생각하는 사람보다 먼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을 따르게 됩니다. 그렇게 신종추원하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백성은 승복하는 마음과 따르려는 마음이 생기니 백성의 덕이 더욱 두터워질 수밖에 업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 장에 시적으로 함축된 내용은 사실 윤동주의 '서시'에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첫구절인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과 마지막 구절인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신종의 마음가짐과 고스란히 공명합니다. 또 '별을 노래하는 마음'은 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에 대한 그리움을 말하니 곧 추원의 심성을 노래한 것입니다. 신종과 추원의 만남이 민덕귀후(民德歸厚)로 귀결되는 것은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구절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종추원이 자여가 강조했던 충서(忠恕)에 상응하는 측면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는 신종은 곧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충(忠)에 공명합니다. 또 추원은 시간적으로 지금, 공간적으로 여기에만 집착하는 것에서 벗어나 근원적 시공간을 그리워하거나 먼 미래를 구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의 나 자신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근원이 되는 조상과 먼 미래의 후손이라는 타인에 대해 열린 자세를 갖는 서(恕)와 연결됩니다.
신종추원은 이렇게 충서와 연결됩니다. 그렇기에 다시 수많은 타인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의 그릇을 의미하는 덕의 확장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