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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소아 Feb 04. 2024

지극한 도는 지극한 덕과 만나나니

1편 학이(學而) 제7장

  자하가 말했다. “현명함을 중시하고 외모를 경시하며, 부모를 섬김에 있어 그 힘을 다하고, 임금을 섬김에 있어 그 몸을 바치고, 친구와 교제함에 있어 믿음 있는 말만 한다면, 비록 배우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운 사람이라 일컬을 것이다." 

    

  子夏曰: “賢賢易色, 事父母, 能竭其力, 事君, 能致其身, 與朋友交, 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

  자하왈    현현이색   사부모  능갈기력   사군  능치기신   여붕우교   언이유신  수왈미학   오필위지학의

     


  첫머리에 나오는 賢賢易色의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는 “현자 좋아하기를 여색 좋아하듯 하라”로 새깁니다. 하지만 <누가 여색을 말하였는가?>(9편 '자한' 제18장과 15편 ‘위령공’ 제13장)에서 살펴봤듯이 이는 후대의 착종입니다. ‘논어’에서 색(色)은 대부분 여색이 아니라 외모를 뜻합니다. 미색(美色)으로 번역할 경우 ‘아름다운 여인’으로 한정 짓는 경우가 많기에 남녀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게 외모로 새기는 것이 현대적 해석입니다. 

    

  다음으로 賢賢과 易色은 ‘술어+목적어’ 구조로 봐야 합니다. 賢은 형용사로 쓰일 때는 ‘~보다 낫다’, 동사로 쓰일 때는 ‘존중하다’의 뜻을 갖습니다. 易가 동사일 경우 ‘가벼이 여길 이’로 새길 때가 있습니다. 둘이 나란히 쓰인 점을 감안해보면 賢은 ‘~를 중시하다’로, 易는 ‘~를 경시하다’로 대비적으로 쓰였다고 봐야 합니다. 그에 입각해 賢賢易色은 ‘현현역색’이 아니라 ‘현현이색’으로 새기고, ‘현명함을 중시하고, 외모를 경시한다’로 풀었습니다.       


  중국 고전학자인 전목(錢穆)과 양백준도 ‘현현이색’으로 새기면서 “아내(妻)의 용모보다 품성을 중시하라”로 풀이했더군요. 부모, 임금, 벗을 대할 때 자세를 다루면서 부부에 대한 내용이 빠졌다는 점에 착안한 해석입니다. 저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굳이 아내의 외모로만 풀이할 필요가 있을까요? 설사 원래 취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양성 평등의 정신에 입각해 해석하는 것이 21세기적 해석일 것입니다.  

    

  공자는 자하가 문학(文學)에 뛰어나다고 평했습니다. 여기서 문학은 예악(禮樂)과 시문(詩文) 및 그 전거가 되는 고문(古文)과 역사(歷史)를 두루 아우른 표현입니다. 요즘 말로 바꾸면 학문(學問)에 해당합니다. 군자학의 양 갈래 길로서 치평의 도와 수제의 덕 중에서 치평의 도에 해당합니다. 헌데 자하는 그런 학문을 배우지 않아도 외모보다 현명함을 택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 충성하고, 친구의 믿음에 보답하면 이미 학문을 배운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자하의 발언 그대로를 놓고 보면 효제충신의 수식적 인간관계를 강조한 후대 유학의 향취가 물씬합니다. 자하 역시 자여(증자)-맹자-주자로 이어지는 수제학 계열의 유학자로 봐야 할까요?   

   

  저는 그것이 자하가 한 말이라는 점에서 역설적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악과 시문, 고문, 역사를 두루 섭렵하며 치평의 도를 연구해 보니 수제의 덕을 열심히 수양하는 것과 결국 만나게 되더라는 깨달음의 천명으로. 이는 자하가 학문의 대가였기에 꺼낼 수 있는 말로 봐야 합니다.     


  반대로 자여와 같은 수제파의 경우 수제의 덕을 열심히 수양하다 보면 부지불식간에 치평의 도까지 터득하게 되더라고 토로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그런 발언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순임금이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바르게 남면하고 앉아있기만 한 것으로 무위이치(無爲而治)로 태평성대를 열었다는 공자의 발언(15편 ‘위령공’ 제5장)이야말로 그에 대응하는 발언 아닐까 합니다.  

    

  이렇게 지극한 도와 지극한 덕이 만나게 되는 경지가 바로 어짊인 것입니다. 인간적 덕목을 실천하는 사람에 대해 “비록 배우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운 사람이라 일컬을 것”이라는 자하의 발언이야말로 그가 최소한 어짊의 경지를 엿볼 수 있는 수준까지 학문에 매진했다는 증거로 풀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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