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학이(學而) 제6장
공자가 말했다. “젊은이들이여, 집에선 효도하고, 밖에선 공경하며, 삼가되 미덥고, 뭇사람을 널리 사랑하되 어진 사람을 가까이하라, 그러고도 여력이 있으면 글을 배우라.”
子曰: “弟子, 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
자왈 제자 입즉효 출즉제 근이신 범애중이친인 행유여력 즉이학문
제7장에서 살펴본 자하의 발언과 이 장에서 공자의 발언을 비교하면서 음미할 필요가 있습니다. 똑같이 수제의 덕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자하는 부부, 부모, 임금, 친구 관계에서 중요한 덕목을 이야기합니다. 공자도 효제근신(孝悌謹信)과 범애친인(汎愛親仁)을 말합니다. 원문의 '아우 제(弟)'에는 동생과 제자, 젊은이란 뜻 외에도 공경하다의 뜻도 있었으나 후대로 가면서 ‘공경할 제(悌)’가 그 뜻을 전유하게 됐습니다.
자하의 말과 공자의 말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자하 발언에 들어있지만 공자 발언 속에 빠져있는 것. 곧 임금에 대한 충성입니다. 자하는 임금을 섬김에 목숨을 아끼지 말라고 합니다. 공자는 안에선 효성, 밖에선 공경을 말할 뿐입니다. 임금에게도 공경한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셈이지요.
공경함만으로는 미진하다는 생각에 덧붙인 내용이 근이신(謹而信)입니다. 주희는 이를 ‘행동을 삼가고 말이 미더워야 한다’고 풀었습니다. ‘주역’에 나오는 ‘평소 말을 미덥게 하고 평소행동을 삼간다(庸言之信, 庸行之謹)’는 구절을 원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언행 모두에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밖에서 사람을 공경함은 곧 언행을 삼가고 신실하게 하라는 뜻으로 새기면 충분합니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범애(汎愛)와 친인(親仁)은 훗날 묵가와 유가를 가르는 잣대가 됐습니다. 범애는 두 갈래 해석이 가능합니다. ‘뭇사람을 사랑함에 차별이 없어야 한다’와 ‘뭇사람을 사랑하되 너무 깊지 않게, 범연(泛然)하게 사랑하라’입니다. 전자는 묵가의 겸애(兼愛)와 상통하니 평등한 사랑이라면 후자는 맹자 이래 유가의 별애(別愛)와 공명하니 부모형제를 사랑하는 것과 생판 모르는 만을 사랑하는 것이 차별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묵자와 맹자의 논쟁이 벌어진 이후 후대의 해석이란 점에서 작위적입니다. 공자가 처음 이 말을 꺼냈을 때의 정신으로 돌아가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문맥 상 범애와 친인은 대조적 의미를 지닙니다. 뭇사람을 널리 사랑하되 특히 어진 사람을 더 흠모하고 본받으려 노력하라는 의미로 봐야 합니다.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전혀 모르는 타인과 잘 아는 지인에 차별을 두지 말고 동등하게 대하되 그 사람됨이 어진 경우에는 심혈을 기울여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공자가 말한 범애에는 맹자가 말한 별애보다는 묵자가 말한 겸애의 뜻이 녹아있습니다. 다만 어진 사람을 사랑함에 있어서는 질적이 차별이 있을 수 있음을 상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맹자의 유학과 공자의 군자학의 차이를 여기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맹자는 금수도 자기 새끼와 부모를 더 아낀다며 별애가 더 인간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군자학은 다릅니다. 공직을 맡을 군자는 그런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 다른 백성보다 가족을 우선시해서는 안 됩니다. 필요하다면 백성을 위해 가족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하니 그게 바로 살신성인(殺身成仁)인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살신성인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두말할 나위 없이 어진 사람입니다. 군자학에선 그런 사람에 대해 범애를 뛰어넘는 애정을 쏟을 수 있으니 자하가 말했듯이 목숨까지 바칠 수 있습니다.
실신성인의 이런 선순환을 우리는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조자룡이 유비의 간난아들 유선을 구사일생으로 구해왔을 때 유비가 유선을 바닥에 팽개치며 “아들은 또 낳을 수 있지만 그대와 같은 장수를 내 어찌 또 구할 수 있겠소”라고 외치는 장면입니다. 조자룡이 어진 주군의 자식을 구하려 살신성인을 실천하자 유비 또한 그에 감복해 부자지정까지 끊어낼 수 있다는 살신성인을 보여준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임금이 어진 임금인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어질지 못한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이렇듯 공자는 모든 임금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충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한 세대 아래 제자인 자하는 임금이라면 무조건 목숨까지 바쳐 충성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태가 일어났고 이는 이후 눈덩이처럼 커져 군자학의 본 정신을 훼손할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하의 말과 공자의 말이 공명하는 대목도 있습니다. 둘 다 형식논리로는 학문을 통해 치평의 도를 터득하는 것보다 일상에서 수제의 덕을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말하는 것 같지만 결국 배움(學)이 없다면 화룡정점(畵龍點睛)이 완성될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력이 있으면 글을 배우라는 말을 뒤집어 말하면 글을 배우지 않으면 결국 어짊을 완성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어진 사람을 흠모하고 본받고자 한다면 결국 어떻게든 여력을 다해 글을 배우는 학문(學文)을 해야 한다는 소리인 것입니다. 여기서 學文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학문(學問)과 다릅니다. 보통은 자하의 전문 분야인 예악과 시문, 고문과 역사에 정통해지는 것으로 풀이합니다. 저는 한 발 더 나아가 문덕(文德)의 빛나는 힘을 깨치는 것으로 풀이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