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 ‘세 그루 집’
● 장소 경북 상주시 낙동면 구잠리 535번지
● 준공 2018년 9월
● 설계 김재경
● 수상 2019년 한국목조건축대전 대상
2019년 건축가협회특별상 엄덕문건축상
2020년 영국 Architectural Review지 선정 ‘House Awards Longlist’
SF 장르 중에 대체역사물이란 게 있다. 역사적 가정법을 현실에 적용했을 때 현재나 미래를 그리는 작품이다. 이런 대체역사의 상상력이 적용된 건축이 등장했다. 경북 상주에 있는 스물다섯 평(82㎡) 짜리 주택 ‘세 그루 집’이다.
김재경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가 낙향한 부모님을 위해 설계한 이 집은 3가지 역사적 상상력에 기초한다. 첫째, 조선 후기 목재가 고갈되지 않아 한국의 전통 목재건축이 계속 진화했더라면. 둘째, 러시아 캐나다 북유럽 동남아 목재를 구한말부터 싸게 들여올 수 있었더라면. 셋째 20세기 건축을 대표하는 콘크리트 구조가 발명되지 않았더라면.
왜 그런 상상력이 필요했을까. 1988년 프리츠커상 수상자인 브라질 건축가 오스카르 니에메예르(Oscar Niemeyer)의 말처럼 “확장되는 경간(徑間·기둥과 기둥 사이 서로 마주 보는 면의 거리)과 특이한 캔틸레버로 상상의 날개를 펴게 해 줘 20세기 건축과 한 몸이 된 강화 콘크리트”에 대한 염증이 첫 번째였다. 콘크리트 건축을 빼면 현대건축 중 얼마나 살아남을까.
두 번째로 제작과정의 효율성만 높였을 뿐 조선시대 한옥을 답습하는 것을 ‘전통의 현대화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반항심도 컸다. 형태적 진화가 없는 것은 전통이 아니라 퇴보 아닐까. 마지막으로 목조건축을 빼고는 동아시아 건축의 전통을 말할 수 없다는 건축가로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다. 목조건축이 전통 건축에 머물지 않고 현대에도 계속 진화했다면 어떤 건축디자인으로 발전했을까.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게 목조건축의 공포(栱包)였다. 처마 끝의 무게를 떠받치면서 기둥머리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공포는 보통 화려한 단청(丹靑)이 가져다주는 각인효과가 크다. 김 교수가 주목한 것은 단청 뒤에 숨겨진 공포의 결구(結構) 구조였다.
부재가 서로 얽히고설킨 공포야말로 목조건축의 백미(白眉)가 아닐까. 만일 공포가 자가 증식한다면 어떤 형태로 진화했을까. 못을 쓰지 않고 목조를 짜 맞추는 결구의 미학을 극대화한다면 어떤 형식의 건축이 가능할까.
이런 고민을 풀기 위해 컴퓨터 프로그램을 사용해 비정형 건축 설계를 가능케 하는 파라메트릭 기술로 전통 건축의 공포 구조를 변형, 합리화, 재구성하는 작업에 매달렸다. ‘나무 시리즈’라고 명명한 그 작업의 산물로 공포의 개별적 기본 구조가 반복되면서 동일 구조를 확대 재생산하는 프랙털 구조를 추출해냈다
‘세 그루 집’은 그렇게 추출된 프랙털 구조의 공포를 적용해 설계된 집이었다. 그렇지만 밖에서만 봤을 때는 한옥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은 멀었다. 외부 벽체는 시골 창고에 흔히 쓰이는 폴리카보네이트 골판이었다. 또 요즘 시골 주택에서 종종 보이는 납작한 평지붕 형태에 경사를 살짝 줘 변형된 박공지붕 형태를 한 것 역시 특이하다고까지 말할 순 없었다. 6각형의 대지 위에 박스형으로 둘러친 벽면이 높다는 점과 낮에는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상층부가 통유리로 돼 있다는 정도만이 눈길을 끌었다. 굳이 전통적 요소를 찾아 표현하자면 ‘벽면이 높은 키 큰 너와집’ 형태라고나 할까.
그러다 집 안으로 들어선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앞에서 콘크리트 예찬론을 펼친 니에메예르는 “다른 미술작품도 그렇지만, 건축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놀라움”이라고 했는데 정확히 그 말에 부합하는 경이감이 들었다.
얼핏 보면 천장을 가득 채운 벌집 형태가 3개의 기둥을 타고 지상까지 내려온 형상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전통 사찰이나 궁궐의 기둥 위를 장식하던 공포가 스스로 자라나 천장이 되고 기둥이 됐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만 우리에게 익숙한 단청을 칠하지 않아 그 공포 구조를 알아보기 힘들었을 뿐이다.
개인적으로 서양 동화 ‘잭과 콩나무’가 떠올랐다. 잭이 시장에 가서 소 세 마리와 바꿔온 콩 3개가 자라서 하늘에까지 닿는 콩나무가 자랐듯이 공포의 원형을 간직한 목구조 3개가 자라고 또 자라 천정까지 덮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자세히 관찰해보면 그 콩나무는 6단으로 돼 있다. 아래로 갈수록 종축이 길어지고 위로 갈수록 횡축으로 늘어나긴 하지만 기본 형태는 동일한 ‘리좀(rhizome) 구조체’다. 자작나무 합판을 끼워 맞춘 그 단위 구조의 숫자가 4006개나 된다고 한다.
진짜 놀라운 점은 이런 복잡다단한 구조체가 못을 사용하지 않고 정교하게 짜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구조체의 하중을 분산하면서 목재의 수축과 팽창까지 정밀히 계산해 재조립 가능하도록 합판을 절단하는 작업은 현대적 ‘디지털 패브리케이션(Digital Fabrication)’의 산물이었다. 다만 전체적으로 비정형 구조여서 목재와 목재가 수직으로 접하지 않는 극소수 부위에 한해 금속 조인트를 사용했다.
“이 건축의 궁극적 목표는 우리 목조건축 결구 구조의 순수한 힘과 아름다움을 전면에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단청을 칠하면 그걸 제대로 보여줄 수 없기 때문에 일부러 아무런 칠을 하지 않았습니다.”
‘세 그루 집’의 다른 구성요소는 모두 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최소한의 설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변 농가와 조화를 위해 외형을 평범하게 설계했듯이 바닥 역시 나무 구조와 분위기가 잘 어울리게 하기 위해 갈색 톤의 친환경 바닥 코팅재를 사용했다. 또 전통 공포 구조의 확장을 보여주기 위해 실내 구조는 방과 부엌, 거실을 나누지 않고 통으로 사용하도록 하는 스튜디오 형태를 채택했다.
그 대신 내부 가장자리에 목조계단으로 연결되는 다락방 구조를 만들어 침실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단, 프라이버시를 유지할 수 있도록 기둥과 리좀 구조로 적절히 가려놓아 1층에선 2층을 볼 수 없다. 상층부를 3중 유리로 설계한 이유는 실내로 빛이 잘 들도록 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밖에서도 독특한 목재 결구 구조가 은은히 비치도록 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이런 파격적 주택 설계가 가능했던 것은 김 교수가 설계를 맡고 건축 비용은 남동생과 함께 분담했기에 가능했다. 지난해 가을부터 이곳에서 살고 있는 김 교수의 어머니 최경숙 씨는 “익숙한 공간이 아니다 보니 아무래도 생활하는데 불편한 점이 없진 않지만 워낙 독특한 공간 구성 때문에 찾아오겠다는 친구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세 그루 집’은 김 교수가 5년 여 구상한 ‘나무 시리즈’의 성과가 적용된 첫 건축 작품일 뿐이다. 경주에서 한의원과 미술 관련 문화시설을 겸한 공간 설계와 한옥마을로 유명한 양동마을의 주택에도 확장된 공포 구조가 적용될 새로운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