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션
2025.12.12
액션
지금부터 노르웨이 한인회 송년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박수소리와 함께 송년회 시작을 알리는 흥 쾌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주방에서는 지직지찍 넉넉한 기름에 둘린 바삭한 지짐이 소리가 박자를 맞춘다. 반지르 윤기 나는 차진 쌀밥과 고소한 참기름 냄새로 두르친 제육볶음. 속이 꽉 차 야무지게 말린 김밥과 통깨가 아낌없이 뿌려진 오색빛 잡채는 그동안 한식을 그리워했던 모든 이들의 군침을 돌게 했다. 무대 옆에 아이들은 일 년 동안 손 발을 맞춰 준비한 장기자랑 발표를 앞두고 거울 앞에서 치장을 하느라 리허설은 뒷전이다. 뽀얀 얼굴에 토닥이는 분칠은 수줍었고, 빨간색 반짝이는 립스틱은 제법 과감했다. 옷매움새를 가다듬고 머리를 손질하면서 서로 거울 앞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자리싸움은 까르르 웃음소리를 자아낸다.
남북으로 길게 뻗친 노르웨이 땅에서 동서로 길게 퍼져가는 어두운 겨울을 보내던 중, 오랜만에 한인회 송년회 자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웃음꽃을 피운다. 식사시간에 접시에 가득 채운 풍성한 음식은 보는 사람, 먹는 사람을 모두 배부르게 한다.
장기자랑이 시작되자 남자 아이돌 그룹 "소방차" 팀이 나와 뻣뻣한 댄스를 선보이자, 뒤 이어 나온 여자 아이돌 "리틀 시스터즈"는 부드러운 춤선을 뽐내며 장기자랑 1등을 차지했다. 사회를 보던 나는 1등을 차지한 여자 아이들 팀에게 커다란 선물을 건넸다. 시상식 무대에 상기된 얼굴로 활짝 웃음 짓는 아이들은 여간 기쁜 것이 아니었다. 데뷔 무대에서 오빠들을 제치고 1등을 차지했으니 말이다. 참가팀이 단 두 팀이었으니, 남자아이들은 자동으로 꼴찌팀이 되었다. 기쁜 마음에 서둘러 열어본 선물이 프라이팬 주방세트라는 것을 알게 된 아이들은 급하게 실망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아이들의 동심을 파괴한 것 같은 미안한 죄책감에 아직도 아이들 표정이 내 기억에 생생하다. 그러나 실망한 표정도 잠시, 무대를 내려가 엄마의 품으로 달려가는 아이들의 모습은 환하고 밝았다. 받은 선물을 흔들며 나 잘했지? 나 잘했지?를 재차 확인하며 엄마의 따뜻한 손길을 받는 아이들의 표정은 참으로 행복해 보였다. 무대 앞에 수북하게 쌓아 놓은 선물상자가 하나둘씩 줄어들 때면, 손에 쥐어진 행운권 번호와 무대를 번갈아 쳐다보며 내 번호 뽑히기를 기다리는 눈빛은 남녀노소 구별 없이 모두 어린아이 눈빛이 되었다. 이것이 벌써 10년 전 오늘의 일이다.
10년이 지났다.
올해도 노르웨이 한인회 송년회가 잘 끝났다. 올해는 일찌감치 11월 중순에 송년회를 마쳤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그동안 그리웠던 분들과 오랜만에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 못 보던 사이 훌쩍 커버린 아이들을 보면서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간 시간을 실감하는 웃음. 새롭게 노르웨이라는 멀고도 낯선 땅에 도착해 한인회 모임에 처음으로 참석한 새로운 얼굴들. 모두 각기 다른 모습으로 만났지만 이 시간만큼은 모두 한 마음이었다. 정성스럽고 맛깔나게 준비한 소불고기, 돼지불고기, 오징어무침, 닭강정, 잡채, 소고기 김밥, 참치 김밥, 만두, 해물파전, 호박무침, 샐러드, 김치는 너무 맛있고 풍성한 저녁식사 었다.
단체 사진을 찍는데 150명이 넘게 와주신 분들을 한 장의 사진에 담기가 힘들어, 그룹 1, 2로 나누어 사진을 찍은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2부 순서 장기자랑에서는 수준 높은 피아노 연주, K-POP 댄스, 바이올린, 기타, 팬플룻 중주, 노래 등으로 장기를 뽐내주신 한인분들과 모두 함께 손뼉 치며 하나가 되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특별히 Hadeland 노르웨이 학생들과 우리 한인 학생들의 콜라보 K-POP 댄스는 장기자랑 시간의 절정을 이루었다. 자유 노래방 시간에는 10대 어린이들이 부른 로제의 <아파트>와, 이에 대한 답가로 40-50 세대가 부른 윤수일 씨의 <아파트>는 세대를 넘어 우리 모두를 응원하는 응원의 장이었다.
송년회를 마치고 자리를 정리하는데 한 7-8살 꼬마아이가 다가오더니,
"삼촌, 오늘 송년회 너무 재미있었어요!" 하며 두 손으로 엄지 척을 쏘아 주었습니다.
잠시 후 70세가 넘으신 원로분이 오셔서,
"신 회장, 오늘 송년회 너무 재미있었네."
라고 말씀해 주시니 송년회 행사를 준비하면서 쌓였던 피로가 모두 깔끔히 사라지는 듯했다. 함께 준비하고 애써준 모든 임원단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10년 전 2015년 송년회. 그리고 올해 2025년 송년회.
10년 전 송년회를 함께 준비했던 한 분이 올해 송년회에는 참석하지 못하셨다.
오늘 그분의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이순을 갓 넘긴 아름다운 나이에 우리의 곁을 떠나셨다. 억장이 무너지는 가슴을 누르며 조문객을 한 명 한 명 맞이하는 가족들을 보며 마음으로 함께 울었다. 하늘도 우는 듯 비가 내렸다.
노르웨이 장례식은 한국과 많이 다르다. 생전에 살시던 인근 교회에서 장례식 예배가 진했됐다. 애도를 표하는 교회 종탑 종소리와 예배당에서 깊게 울려 퍼지는 파이프 오르간 소리는 예배장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Amazing Grace 노래를 시작으로 모든 조문객들이 함께 찬양을 부르며 마지막 가는 길에 눈물로 위로를 전했다. 고인의 어릴쩍부터 한평생 일생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으신 훌륭하신 분이셨다. 유가족 중 아들과 딸이 나와 추모사를 낭독하자 조문객은 함께 흐느꼈다. 한인교회 성가대에서도 마지막 찬양으로 고인의 하늘 가는 길에 함께 했다. 한 시간 넘게 예배를 마치고 교회 뒷마당으로 나갔다. 여기에 바로 장지가 있었다. 딸로 봉분 없이 각기 다른 모양의 작은 비석이 줄지어 있었고, 고인을 기리는 마음을 꽃에 담아 비석 주면에 헌화하며 마지막 고별인사를 했다. 교회 종탑의 종소리는 여전히 은은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장례식을 마치고 조문객과 함께하는 식사자리에서는 고인의 일생 중 행복한 순간을 엮은 슬라이드가 스크린에 비춰졌고, 고인과 함께 했던 추억과 미담을 나누며 유가족과 조문객을 조문객은 위가족을 위로하는 시간이 계속됐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는가?
삶과 죽음이 같이 맞닿아 있다고 얘기한다. 집에서 지내다 문을 열고 뒷마당으로 나가는 것이 죽음이라고 한다. 그래서 장지도 교회 뒷마당에 있다고 한다. 가족들은 자기가 살던 인근에 있는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뒷마당으로 나가 성묘를 드린다. 삶의 공간과 죽음의 공간이 뒷마당문 하나 사이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죽음의 공간 뒤에는 알 수 없이 막연한 영원한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삶의 마지막을 교회에 맡긴다.
장례식을 마치고 집으로 왔다. 예전에 찍은 사진을 주기적으로 상기시켜 주는 스마트 폰 덕분에 오늘이 10년 전 고인과 함께 준비했던 한인회 송년회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삶이란 무엇일까?
한평생 꿈을 향해 처절하게 달려가며 무엇인가 이루고자 했던 야곱도 자신의 인생을 나그네라고 고백하였듯이 (창세기 47장 9절). 천하를 호령하며 모든 걸 다 가졌던 다윗왕도 자신의 인생을 나그네가 우거 하는 그림자 같은 세상이라고 고백하였듯이 (역대상 29장 15절). 나그네 같은 우리 인생에 늘 아쉬움과 슬픔이 남는 건 유한한 세상에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서일까?
지난 송년회 사진을 보면서 삶이란, 세상이라는 좁은 무대에 올라와 준비했던 장기자랑을 마치고, 무대를 내려와 영원한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마치 장기자랑 시간에 실수할까 봐 전전긍긍하며, 연습하고 반복하고, 떨리는 마음에 무대에 오르기 전 긴장하고, 무대에 올라 마음껏 춤과 노래 실력을 뽐내보지만, 기쁜 듯 아쉬운 듯 나의 순서를 마치고, 환하고 밝게 웃으며 영원한 엄마의 품으로 달려가는 송년회 장기자랑 같은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 세상에서 나만의 장기자랑을 준비하며 살고 있다. 삶이라는 만만찮은 무대에서 갈고닦으며 준비했던 나만의 장기자랑 순서를 기다리며, 기뻐하고, 노여워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들의 무대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세상이라는 무대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내일이라는 무대를 준비하며 살고 있다. 내일 열리는 삶의 무대를 위해 떨리는 마음으로 나만의 장기자랑을 연습하고 준비하다, 마침내 나의 순서가 왔을 때 그동안 준비했던 나의 모든 장기를 마음껏 펼쳐 보이는 것이다. 세상의 장기자랑에는 1등도 없고 꼴찌도 없다. 프라이팬과 같은 실망스러운 상품도 없다. 하지만 가장 기쁘고 행복한 것은 장기자랑을 열심히 준비했던 시간들과, 장기자랑을 마치고 무대에서 뛰어 내려가 그토록 사무치게 그리운 엄마의 품으로 달려갈 때, 참 잘했다! 참 잘했어! 하며 토닥여주는 엄마의 따듯하고 사랑스러운 영원한 손길일 것이다.
내일이라는 삶의 무대의 리허설은 오늘이다.
오늘도 힘차게 리허설 준비해 본다.
레디…... 액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