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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채 Mar 17. 2016

외할머니와 꿈

그리고 슬픔.

 보통은 글을 쓸 때 마음 내키는대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타이핑하고, 제목을 나중에 짓는 편인데 오늘은 제목부터 떠오르기에 생소하지만 일단 제목을 먼저 쓰고본다.

글을 시작하기에 먼저 꿈을 언급하게 된 계기를 써보자면, 간밤의 꿈에 샤크라 2집의 거의 모든 트랙들을 되새겼다.


너무나도 신기하고 놀랬던게, 기억속에서 까맣게 잊고있었던 2001년 발매된 꽤 오래된 이 앨범을 아무런 연유도 없이 꿈에서 정확하게 가사까지 되새기고 따라부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쇼킹할 법한지라 꿈에서 깨고나서도 한참을 멍하니 누워있었었다. 

먼저번 썼던 기억에 관련된 글과 연결된 느낌도 나지만, 이유가 어찌됐던 먼지를 뒤집어쓰고 고이 잠자던 기억중 하나가 꿈에서 스스로 끄집어내어져 꽤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 것 같다. 

외할머니와 꿈을 함께 떠올리기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꿈을 자주 꾸는 아닌 나에게 거의 유일하게 꿈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존재를 확인시켜주시는 분이니까.


나는 외할머니가 키워주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많은 시간을 외할머니와 함께 지냈었다.

부모님은 나름 ''사''자 직업을 가지고 바쁘게 지내시는 분들인지라 나한테는 외할머니가 항상 일순위었다.

외할머니 역시 인텔리 출신이시고 이런저런 사교모임에 자주 출석하시고 나를 함께 데리고 다니셨었다.


어린 내눈에도 참 멋있었던게, 하얀 피부에 작고 갸름한 얼굴, 마른 몸매이신데 긴 다리에 은근 글래머러스한 그 당시에는 결코흔하지 않은 눈에 띄는 외모를 지니셨던 기억이 난다. 화려한 의상이 없이도 온몸에서 풍기는 그 고귀함이시란. (지금 생각해봐도 난 외할머니의 반의 반도 못 따라간다, 외모로 보나 매력으로 보나)


성격도 참으로 고고하시고 자존심도 굉장히 센 분이셨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한테는 정말 호쾌하고 따뜻하셨다. 

미소를 잃지 않으셨고 누구 험담 하시는 법도 전혀 없으시고 특히 유일한 외손녀인 나한테는 따스한 보살핌도 당연하겠지만 당신 특유의 스타일리쉬함으로 어린 나한테도 꼬까옷보다는 심플하면서도 시크한 옷을 사주시는 등, 내가 봤을때는 꽤나 앞서가신 분이셨다. 


그러던 외할머니가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쯤 한국에 잠깐 들어가셨었다. 

몇 달 뒤인 어느날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외할머니와 저녁때 안부전화를 마치고 나는 자러 갔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꿈에서 뵙게 되었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외할머니를 말이다. 꿈이 너무도 생생해서 아침에 일어나나자마 엄마한테 얘기했다. 그리고 한시간도 안되어서 집에 걸려온 전화, 외할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하셨기에 위급하진 않지만 현지에서의 장기치료를 위해서 급히 출국을 정해셨다는 거, 그래서 이탈리아에 돌아오신단다. 그때 온몸에 쫙 돋던 소름이란. 태어나서 처음 겪는, 텔레파시가 통한다는 느낌. 나한테 외할머니가 각별하게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조금 더 어렸을 때 기억은, 성격이 깐깐하면서도 괄괄하신 분이셨던 외할머니한테 내가 대들었었다. 

당연히 야단맞았다. 그리고 받은 벌이라곤 울음을 그치고 구구단을 외우라는 것. 서러워서 펑펑 울던 상황에서 손가락을 꼽으면서 구구단을 외우는 것은 어린 나에겐 꽤나 치욕적인 일이었다. 그래도 외할머니가 무서워서 끝까지 셈을 끝냈더니 외할머니가 안아주셨다. 덤으로 초콜릿까지 선물로 받았고.

외손녀인 나를 혼내시고서 얼마나 맘이 아프셨을까. 나중에 커서 그 당시를 회고해보면 맘이 짠해진다. 

할머니는 절대로 ''우쭈쭈,오구오구 우리 애기''하시던 분이 아니라는걸, 하여 우는 나를 달래주시진 않지만 그래도 적어도 나한테는 유용했던 구구단이라도 외우게 하셨다는 걸.


세월은 흐르고, 부모님은 이혼하셨고, 우리 가족성원들은 각자 삐끄덕대는 삶을 살게 되었다. 

양반가 출신에 항상 고고하게 살아오신 외할머니는 연세가 너무 많지 않으심에도 불구하고 급격하게 달라진 삶때문에 쉽게 정신을 놓아버리셨고, 나한테 큰 정신적 지주셨던 분이신지라 막 사춘기에 접어든 나한테는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철없던 나는 웬지 창피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구슬프기도 하여 외할머니를 멀리 했었다. 너무나 생소한 느낌의 처음 보는 멍한 눈빛의 외할머니. 믿을 수가 없었다. 마음속으로 한없이 외쳤던 소리는 ''우리 외할머니는 이런 모습일 수가 없어!''. 


아직도 기억난다. 

어느 하루, 외할머니는 갑자기 정신을 찾으셨다. 

나와 함께 창밖을 바라보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쳐다보다가 문득 지나가는 한 우체부를 보시며 말씀하셨다.

''엄마한테서 편지가 올라나?'' 

''음...그러게요. 엄마가 편지랑 사진이랑 보내준다고 했는데.''(그때 나와 외할머니가 함께 살고, 어머니는 다른 나라에 계셨다)

''근데 할머니, 할머니가 이렇게 건강하시니 참 좋아요.''

''그러게말이다. 너랑 함께 오래 살아야지.''

'''그럼요, 할머니. 오래오래 나랑 함께 살아요. 울 남친도 할머니한테 인사드려야 하는데 히히.''


... 그리고 다음날, 외할머니는 영영 먼길을 떠나셨다. 


나는 믿는다. 

외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나와 인사를 나누기 위해 그날 잠깐 돌아오셨었다는 걸.

떠나실 걸 직감하시고. 예전에 나와 텔레파시를 통해서 예언을 하셨던 것처럼.


밤새워 임종을 지키고 울다가 실신한 나는 결국 장례식에 가지 못했다. 

아무일도 없었던 듯 운동하러 가서 지인들과 함께 농담하고 시간을 보냈다. 

돌아가신 분에 대한 기억을 머리와 마음에서 통째로 들어내고 그렇게 살아가기 시작했다.

불현듯 떠오를 땐 그자리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오열해서 옆사람들을 놀래키기도 했다. 


겉으론 아니라고 거부하면 할 수록 꿈에서 끝도 없이 외할머니가 보이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외할머니와 밥 먹으러고 다니고 쇼핑도 다니고, 그리고 더 신기했던 건 꿈을 꾸면서도 ''이게 꿈이구나''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아, 외할머니는 돌아가셨었지.''라고 나중에야 소스라치게 뒤늦게야 깨달았다는 것. 그 뒤에 뒤따르는 건 항상 깊은 슬픔이었다. 

떠나보낸 분을 억지로 잊으려 했던 나에 대한 엄청난 분노와 할머니에 대한 깊은 죄책감. 가슴을 붙잡고 아파하는 건 남아있는 나의 몫이었다.

 

철수의 판화이야기 중.


오늘 유지나 작가의 ''르네 마그리트의 '연인'''이라는 소설을 읽고있었다. 거기서 이런 대목이 있었다.


어느 미술치료사는 애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아주 복잡하고,미묘하고,어렵고,힘들고,길고 긴 과정''이라고.

그 길고 긴 상실의 시간을 건강하고 적극적인 방법으로 충분히 슬퍼한 사람들은 애도의 시간이 끝난 후 오히려 삶 속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경험할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로든지 애도의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한 사람들은 그 남은 인생의 시간들이 송두리째 상실감 속에 내동댕이쳐진다. 그런 사람들은 결국 상실의 늪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아마 이 글을 쓰면서도 은연중에 예전의 외할머니와의 행복했던 기억들을 나열하지 못하고 근근히 남아있는 외할머니와의 마지막 기억들과 그 이후의 슬픔에 대해서만 치중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인지 싶다. 

솔직히 지금 이 순간도 나는 어제 꾼 꿈을 상기하고 있다. 

너무나 당연하듯 외할머니, 엄마와 나 세사람이 함께 중국레스토랑에서 밥먹는 꿈. 

외할머니랑 먼저 주문하고 엄마는 또 쇼핑하느라 늦네 하면서 채근하고, 엄마가 쇼핑백들을 줄줄이 들고 뒤늦게 도착해서 함께 웃고있던 행복한 꿈. 

''달콤한 인생''중.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랑이 존재하고, 남녀사이의 사랑을 초월하는 사랑이 없다는 걸 나는 부정하고 싶다. 


아마추어지만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그래도 글의 중심요소인 ''사건발단, 흐름''등을 무시하고 싶진 않지만 무언으로 금지된 오랫동안 묵혀온 감정을 힘들게 조절하며 쓰게 되었다. 이 글을 읽은 분들한테 이 점 양해 부탁드린다. 날 사랑해주신 분, 그분의 고고하셨던 모습에서 내 눈앞에서 아스라이 사라지신 분, 그런 분한테 못되게 불효를 하고 아직까지 속죄하고 있는 나, 그래서 더더욱 꿈속에서나마 속죄를 비는 내 마음. 이 글을 빌어서 애도를 비는 바이다. 마음의 죄가 가벼워지지 않을테지만 굳이 이 두서없는 글을 쓰는 이유를 대라면 아마 열거한 위의 몇가지일 것이다. 


꿈에서라도 더이상 외할머니를 잡고있지 말기를.

잘 가셨기를.

내 슬픔도 이해해주시고 어루만져주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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