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기 시작한 계기
“편지 한번 써보지 않을래?” 맥주의 취기를 한창 즐기고 있는 제게 하신 말씀입니다.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한 달에 한 번 편지를 쓰고 우리끼리 공유하는 거지.” 군대를 갓 전역하고 사회로 나와 ‘불가능은 없다.’라는 일념 하나로 무엇이든 해보고자 했던 청년에게 너무 솔깃한 제안이었습니다. 마침 몇 년간 일기를 꾸준히 쓰는 중이었는데 이제는 혼자만 보는 글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습니다. 늘 ‘글 쓴다’라는 생각이 들면 머뭇거리고 주저하게 되는데 ‘편하게’ 쓰면 되는 거라 하시니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저는 당연히 합니다!” 19년 3월 그렇게 ‘글나누리’ 모임이 시작되었습니다.
‘부담 없이 가볍게 쓰면 된다’라는 말씀에 정말 편한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 친구들과 야구장에 갔던 일들을 쓰며 일기(日記)가 아닌 월기(月記)를 썼습니다. 4명이서 시작한 채팅 방에는 이제 17명의 선, 후배님들과 친구 그리고 선생님이 있습니다.
명절 연휴입니다. 추석 이후로 처음 가는 창원이라 더욱 기대되고, 몇 달간 못 본 가족과 친구들을 만날 생각에 잔뜩 설렙니다. 새벽 세 시부터 부지런히 움직여 도착한 창원은 참 한결같이 반갑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왜 이렇게 고향에 오지 않냐고, 서울이 그렇게 좋냐고 ‘따뜻한 남쪽 나라’답지 않은 찬 바람으로 투정을 부립니다.
명절을 보내고 선생님과 후배님들을 만나는 날입니다. 몇몇 친구들은 편지만 주고받는 ‘사이버 친구’이었지만 이제는 ‘현실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반갑고 신기합니다. 더군다나 정말 오랜만에 새로운 후배님도 함께 삶을 나누겠다고 찾아왔습니다. 매년 11월 수능 시즌이 지나고 연말이 될 때 즈음하여 새로운 후배가 ‘글나누리’ 모임에 올까 기다립니다. 그러다 올해 감사하게도 후배 한 분이 또 찾아 주셨습니다. 초면이 주는 어쩔 수 없는 어색함이 있지만 ‘같은 선생님께 배웠고’, ‘생각 그리고 삶을 공유’하는 공통점이 있어 반가움이 어색함을 밀어냅니다. 매달 30일이 다가올 때의 부담감과 압박감을 이제는 함께 할 수 있다며 농담도 건네며 새롭게 친구가 된 것을 축하하고 새내기가 될 것을 축하합니다.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써.” 행여나 긴장될까 봐 제게 하셨던 말씀과 같은 말씀으로 안심시켜주십니다. 한 후배가 웃으며 말합니다. “편하게 쓰려고 해도 선생님의 편지를 보면 편할 수가 없습니다.” 이심전심입니다.
‘글나누리’이름의 기원을 알려 주십니다. 모임의 터줏대감으로서 이름을 지을 때, 함께 하였기에 알고 있지만 처음 듣는 후배님들은 관심을 가집니다. ‘글’+ ‘나’+ ‘누리(세상)’라는 의미와 ‘글’+ ‘나누리’라는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의미는 짐작하고 있었지만 첫 번째 의미는 예상치 못했다며 유의미한 이름에 감동하는 눈치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1)이름을 불러 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름의 의미까지 알게 된다면 감동하신 후배님들이 ‘글나누리’에 얼마나 더 많은 애정을 쏟을지 기대와 걱정이 번갈아 됩니다.
장소를 옮기기 위해 길을 걷습니다. 총 6명이 길을 걷다 보니 자연스레 둘씩 짝지어 걷습니다. 저는 선생님과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다 앞에 네 명의 후배님들이 걸어가는 모습을 보는데 문득 신기하다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사는 지역도, 나이도 다르다 보니 분명 모르고 살았을 네 명의 친구를 알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누구인지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어떤 삶을 살아가는 중인지 조금이나마 공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들도 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삶을 사는지 들여다볼 것입니다. ‘편지’라는 매개를 통해 ‘삶’을 공유하는 ‘벗’이 되고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19년 3월에 처음 쓴 편지를 읽어 봅니다. 천 자 가량의 편지에는 막 복학한 이십 대 청년의 걱정거리가 두서없이 담겨 있습니다. 웃음이 납니다. 지금도 여전히 삶에 대하여 생각하고 고민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과거의 저도 역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안쓰럽고 또 반가워서 나는 웃음입니다.
당시 편지를 쓰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으면 어떻게 첫 문장을 시작해야 할지부터 분량이 너무 적지는 않은지와 같은 것들을 고민했습니다. ‘편하게’ 쓰라고 하셨지만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고 함께 삶을 공유하는 벗이 많아지자 누군가 내 글을 읽는다는 생각에 ‘잘’ 쓰겠다는 일념으로 너무 힘주어 편지를 쓴 적도 있습니다. 수험 공부를 하던 시기에는 수험생이라는 신분에 대한 불안감과 불만이 많았기 때문인지 날카롭고 공격적인 편지도 있었고, 편지를 읽을 친구들을 의식하여 책에서 읽은 미사여구들을 막무가내로 인용한 탓에 전체적으로 조화롭지 못한 편지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요즘은 꾸밈없이 ‘나’를 담은 편지를 씁니다. 독자들의 감상을 너무 의식하지 않습니다. 작가 손을 떠난 글은 읽는 사람의 몫이라고 합니다.2) 본인들이 알아서 느낄 것이니 그들의 감상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글’을 쓸 때 꾸미지 않고 ‘나’를 담고 ‘세상’을 담아봅니다. ‘글’을 통해 저라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나누어’ 봅니다. ‘글나누리’의 의미가 달콤하게 다가옵니다. ‘부담 없이 편하게 쓰면 된다’는 말씀의 의미를 알아갑니다.
1) 김춘수 시인의 '꽃' 발췌
2) 이도우 작가의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