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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2

아픔과 성장

by 영영

1년에 한 번 감기를 앓습니다. 그냥 콧물이 나고 기침만 콜록이면 좋겠지만 1년에 한 번 아픈 것이니 확실하게 아픕니다. 보통 여름의 초입 혹은 한여름에 감기에 걸립니다. 그 덕분에 더운 날씨에 땀을 흘리며 따뜻한 음료를 마셔야 합니다. 작년에는 너무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링거를 맞으러 갔습니다. 혼자 사는 자취생이 병원에 링거를 맞으러 갔을 정도니 제법 아팠던 것입니다. 3일에서 4일 정도 아팠던 것 같습니다. 기간이 짧았던 만큼 강렬한 감기였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무난하게 여름을 보냈습니다. 마음이 힘든 날들이 제법 있었던 터라 그 아픔들이 육체적 아픔을 대신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올해 감기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생각이 건방졌다고 벌하는 것인지 10월 중순에 보기 좋게 감기에 걸렸습니다. 번거롭지만 스스로를 위한다 생각하고 약도 먹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일주일 정도 되니 많이 호전되었습니다. 늦게 온 감기치고는 너무 힘들게 하지 않았음에 감사하며 안도하려던 찰나 이번에는 갑작스러운 기상 변화가 발목을 잡습니다. 일교차가 너무 커진 것입니다. 해가 뜨기 전 출근하여 해가 질 무렵 퇴근하는 자는 낮 시간대 기상보다는 새벽과 저녁 날씨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부분을 간과한 자는 그 칠칠맞음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렇게 보기 좋게 다시 감기에 걸렸습니다. 앞의 감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새로운 감기가 온 것입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더니 두 개의 감기가 주는 컨디션 저하는 상당했습니다. 수액을 맞으러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었지만 가득 차지 않은 에너지 레벨로 출근도 하고 운동도 하려고 하니 꽤 힘에 부쳤습니다. 결국 병원을 갔습니다. 넉넉하게 약 처방을 받고 얼른 낫기 위해 따뜻한 차도 마시고 비타민도 먹었습니다. 그렇게 늦가을과 초겨울을 계절넘이한 감기는 3주를 지나 4주 차로 접어들 때쯤이 되어서야 조금씩 잠잠해졌습니다. 그렇게 올해도 감기로 아파하고 이겨내며 감기에 대한 할당량을 채웠습니다.

아프고 나면 성장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아픈 것도 필요하다고 합니다. 청춘들에게 많은 위로가 되었던 책에서 읽었는지 아님 삶에 대한 많은 고찰을 수행한 어느 작가가 쓴 책에서 읽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한때는 아픔 후에 성장이 오기에 때로는 아픔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부정하였습니다. 아프지 않고 적당한 시련만 있으면 좋을 텐데 굳이 아파하며 성장해야 하는 정당성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픔’을 ‘아픔’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시간이 또 흘렀습니다. 조금 더 깊어지고 조금 더 넓어지며 조금 더 유연해지고 배포가 커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앓고 나면 성장한다는 말에 제법 고개를 끄덕일 수 있습니다. 그 아픔이 어떤 류의 아픔인지는 무관하지 않을까 합니다.

감기를 걸리기 전 꽤 아팠습니다. 감기로 인해 육체적으로 아팠다면 그전에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몇 해 전 수험생활을 하며 느낀 점이 있습니다. 수험생활을 시작하는 것보다 수험생활을 더 이어가지 않고 다른 길을 찾아보기로 결심하는 것이 열 배는 힘들다는 것을요. 어떤 이유에서든 해보겠다고 마음먹은 일을 물리는 과정에는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실 많이 두려웠습니다. 아무도 모르고 나만 아는 사실이라면 무서울 것이 없을 텐데 그렇지 않았기에 좀 더 어려웠습니다. 이 결정이 나뿐만 아니라 누군가에게도 아픔이 될까 조심스러웠습니다. 어려워서 아팠고 두려워서 더 아팠습니다. 사실 저는 힘들고 아픈 시간을 겪은 후에는 한동안 그때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소파 틈 새에 들어가 열심히 찾아야만 찾을 수 있는 TV 리모컨처럼 기억 서랍 너머 어딘가에 저조차 잘 모르게끔 숨겨 둡니다. 그것들을 기억하면 아픔이 더 선명하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숨겨두고 시간이 지나 그 시간들마저 조금은 미화되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정말 많이 아프고 힘들었기에 제게 2024년 여름의 무더위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냥 좀 더운 날씨가 있었다 정도로 기억합니다. 아픔이 너무 커 더위가 더위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인지, 한여름 마음을 많이 아파했기에 그 시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제 글을 보고 아파할까 봐, 슬퍼할까 봐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로 숨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모르겠습니다. 알람이 울면 일어나고 때가 되면 퇴근하고 출근하면 해야 하는 일들을 마저 했습니다. 그냥 그렇게 지냈던 것 같습니다. 아프지 없었기에 아픔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아팠기에 아픔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못하는 것인지 안 하는 것인지 사실 분간이 어렵지만 기억을 굳이 꺼내려 하지 않는 것을 보면 기억하지 않는 것이 더 어울립니다.

이제는 찬바람이 가끔 불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찬바람이 불어옵니다. 아침에만 불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정오에도 찬바람은 저를 잔뜩 웅크리게 합니다. 또 한 번의 계절의 변화를 절감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아픔이 또 많이 사라졌음을 깨닫습니다. 아프지 않기에 다 괜찮은지 그것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아픔이 있었다는 이유로 지금 어떤 상황이든 그 아픔으로 상황을 정당화하지 않아 다행입니다. 지금 스스로에 대한 아쉬움과 부족함은 오롯이 제 탓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에 대한 아쉬움이 다시 저를 움직이게 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올해는 두 번이나 아팠습니다. 그 아픔은 하나하나가 유의미했습니다. 마음의 아픔은 마음을 성장시켰고 육체적 아픔은 마음을 성숙하게 하였습니다. 또 생각을 조금 더 무르익게 하였습니다. 새롭게 시작되는 달이 급진적으로 행복으로만 가득하길 바라지 않습니다. 한 해가 저물고 새롭게 시작되는 1년이 온갖 좋은 일들로만 가득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아플 수 있고 또 아파야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아픔들을 잘 이겨내길 바랍니다. 그렇게 또 하나의 아픔이 지나고 나면 또 조금 성장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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