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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 그리고 시간

흘러가는 시간과 쌓여가는 우정

by 영영

“어 그래, 왔나? 잘 살제?” 반갑게 악수하며 간단하게 안부를 묻습니다. 누군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립니다. “애들은?” “몰라, 알아서 오지 않겠나?” 아직 오지 않은 이들을 기다리며 몇 달간의 근황을 묻습니다. 얼마 전 명절에도 만난 녀석들이지만 세 달이면 이런저런 일들이 충분히 있을 법한 시간이기 때문이지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저기서 오늘의 주인공이 걸어옵니다. “어 그래, 다들 왔나? 고맙다.” 간단명료합니다. 긴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들 축하한다고 긴장은 안되는지 물어봅니다. 한껏 멋을 부린 친구는 하나도 긴장되지 않는다고, 오히려 긴장이 너무 안되어서 신기하다고 합니다. 정말로 긴장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괜히 우리 앞이라고 귀여운 허풍을 부리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제법 행복해 보입니다. 아까 오지 않은 친구들도 다 왔습니다. 친구의 앞날을 축하하는 자리라고 다들 예쁘게 차려입고 왔습니다. 교복을 입고 함께 야자를 하던 친구들이 정장을 입고 친구 녀석의 결혼을 축하해 주러 삼삼오오 모였습니다. 가족, 친척, 친구 및 직장동료분들과의 촬영이 끝났습니다. 그러고는 기사님께 부탁을 드립니다. 우리 열댓 명 사진 한 번 더 찍어주시면 안 되냐고. 기사님은 흔쾌히 찍어주십니다. 식사까지 마무리되었습니다. 이대로 헤어질 수는 없습니다. 명절에 모이더라도 대체로 가족 일정이 있기에 다 같이 술 한잔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대다수 친구들은 오늘 결혼식 이후 일정을 말하지 않았음에도 일부러 잡지 않고 모였습니다. 목적지 선택에는 망설임이 없습니다. 상남동입니다. 조금 있다 보자 말하고 각자 타고 온 차량에 다시 탑승합니다.

상남동은 추억이 많은 동네입니다. 고등학생 시절, 중간고사나 모의고사처럼 일찍 마치는 날이면 삼삼오오 모여 상남동으로 향했습니다. 아지트처럼 으레 모이는 PC방으로 향합니다. 축구 게임 한 판에 사활을 건 남고생들의 열기로 가득했습니다. 게임상에서 큰돈을 벌어보겠다는 심정으로 좋아하는 선수를 강화하는 한 번의 클릭에 모두가 열광했습니다. 성공하면 부러움의 대상이요 실패하면 놀림감 되기 딱 좋습니다. 아쉬운 모의고사 성적은 까맣게 잊은 채 그렇게 몇 시간씩 최선을 다해 게임을 즐기고는 했습니다. 그 시절 우리가 다니던 PC방은 소리 소문 없이 폐업했습니다. 추억 하나를 빼앗긴 것 같아 아쉽습니다. 이제는 그 동네에서 명절이면 술을 마십니다. 먹성 좋은 청년 여럿은 메뉴보다는 수용 가능 여부가 중요합니다. 한잔 두 잔 술이 들어갑니다. 오늘은 유달리 기분이 좋습니다. 기분이 좋으면서도 싱숭생숭합니다. 그들을 만나면 저는 여전히 열여덟의 고등학교 2학년 학생입니다. 시답잖은 이야기에 웃고 서로 상대가 응원하는 축구팀의 근황이 시원치 않으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놀리기 일쑤입니다. 18살부터 지금까지 10년 정도의 추억도 싹 훑습니다. 많은 순간을 함께 하여 이제는 사건의 시계열도 잊었습니다. 순서가 가물가물한 기억이지만 굳이 바로잡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런 순간에 우리가 함께였음을 추억하고 또 조금은 그리워합니다. 이제는 집에 갈 때가 되었습니다. 택시를 타더라도 같은 방향으로 가는 녀석들은 함께 탑니다. 서로 배웅해 주며 조금 있다 보자고 합니다. 자정이 넘은 시각, 조금 있다 봐야 하는 이유는 이 대장정의 마무리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음날 아침,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봅니다. 눈 뜨자마자 메신저에 메시지를 보냅니다. “큰일이다. 술이 하나도 안 깬다.” 녀석들도 다 비슷한 상황입니다. 오늘 오전부터 일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다들 절주를 했어야 하는데 기쁜 날 그럴 수는 없었나 봅니다. 조금 더 누워 술기운이 가시길 기다려봅니다. 조금 더 누워있으면 좋을 것 같지만 이제는 출발해야 합니다. 얼른 옷을 입고 신발을 챙겨 약속 장소로 향합니다. 다들 눈이 퉁퉁 부어있고 머리의 까치집은 어디까지 올라가 있습니다. 역시나 잘 들어갔는지, 숙취는 심하지 않는지와 같은 애정 담긴 안부는 생략합니다. 모두가 모였는지만 체크하고 공놀이를 시작합니다. 인원이 예전처럼 많지 않아 큰 경기장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끼리 한두 시간 공을 찰 수 있는 공간이면 충분합니다. 새신랑도 왔습니다. 여행을 2주 정도 후에 간다며 새신랑이 주도하여 함께 하는 풋살 경기입니다. 혹시나 다치기라도 한다면 서로 낭패라는 것을 잘 알기에 서로 양보하며 즐겁게 공을 찹니다. 잠시 쉬는 시간에는 커피도 열 잔을 사와 함께 마시며 힘을 보충합니다. 10년 전보다는 공을 다루는 기술이 조금은 무뎌졌을지 모르지만 전에 없던 센스와 지혜로운 플레이가 있습니다. 즐겁습니다. 체육시간에 축구가 아닌 다른 활동이라도 한다면 그렇게 섭섭할 수가 없었습니다. 컴퓨터 게임도 축구 게임을 하던 녀석들인데 직접 하는 축구는 얼마나 좋아했었는지... 그래서 여전히 명절에도 가급적이면 공을 한 번은 꼭 차려고 합니다. 술 마시며 추억을 훑으며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간 우리는 다음날 공을 차며 다시 한번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서울로 올라가는 길 새신랑이 메신저를 남깁니다. 먼 길 와줘서 고맙고 잘 살겠다고. 이제는 우리의 모임에 약간의 장치를 더하기 위해 계비 거두는 방안을 고안하겠다고 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답장합니다. 잔치에 초대해 줘서 너무 고맙고 덕분에 정말 알차고 즐거운 시간 보내고 돌아간다고 행복하게 잘 살아라고.

마음은 여전히 18살에 머물러 있는데 어느새 한 달만 지나면 마음이 확고하게 도덕 위에 서서 움직이지 않을 나이가 되었습니다. 사실 걱정이 많습니다. 아직 저는 도덕 위에 서 움직이지 않을 만큼의 어른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도덕적인 문제에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도의 깊이와 내공을 가진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부지런한 시간과 매정한 세상은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습니다. 서있는 모습을 흉내라도 내라고 합니다. 염려스럽습니다. 그럼에도 주눅 들지 않음은 지난 시간 동안 쌓아온 내공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간 주어진 상황에 최선의 결과를 위해 노력했기에 아마 비틀거리며 오롯하게 서지는 못하여도 열심히 버티고 또 버틸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버티다 이따금씩 그들을 만나면 18살의 그때로 돌아가 추억을 노래하고 행복을 꿈꾸며 우정을 노래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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