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는 이름의 상처

by 이음

엄마라는 단어에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 있다.


그 안에는 한없이 큰 사랑과 희생, 수용, 강인함, 버팀목, 위로, 안도, 추억 등

세상의 위대하고 따뜻한 말들이 담겨있다.


그런 엄마라는 이름에 상처라는 단어를 붙인다는 것은

마치 금기에 손을 대는 것처럼 두려운 일이었다.


초등학생 시절 장대비가 쏟아져도 우산 한번 가지고 마중을 나온 적이 없는 엄마지만,

그래서 홀딱 맞은 채 집에 돌아오면 이불속에서 몸을 젖히고 나와 태연한 얼굴로

비가 오는지 몰랐다고 말하던 엄마지만 그 일을 가지고 원망하거나 화내본 적도 없다.


엄마는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 암 투병을 하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힘든 시간을 보냈으니 자식을 돌보는 일에 좀 소홀했더라도 따지고 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도 있었다.


유치원 때쯤일까.

엄마가 외출하면서 집 문을 잠그고 나를 홀로 계단에 앉힌 후 고구마만 주고 외출한 적이 있었다.

나는 고구마가 든 소쿠리를 들고 차가운 계단에 앉아 멀뚱히 있었다.

얼마 후 위층에 살고 있던 할머니가 나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갔다.

할머니는 나를 씻기고 먹을 것을 주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공부를 못했고 실업고에 갔다.

하지만 언니는 공부를 잘해서 실업고에 갔다. 장학금을 받으면서 학교에 다니기 위해.

그랬던 내가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때

처음 같이 시험공부를 하자는 친구 집에 별생각 없이 따라갔다가 공부라는 것에 재미를 느껴봤다.


나보다 훨씬 공부를 잘했던 그 친구는 공부하는 요령이 있었다.

친구는 친절하게도 시험 범위를 객관식 문제로 만들어서 프린트물로 출력해 주었고

우리는 그걸로 함께 공부했다.

그 프린트물을 몇 번 읽고 시험을 본 후 눈에 띄게 성적이 오르는 경험을 하면서

나는 기쁘다기보단 의아했다.

그게 되는 거라는 걸 나는 몰랐다.


성적이 오르니 담임 선생님의 태도도 바뀌었다.

이미 학교에서 전교 1등이었던 언니의 동생이어서 몇몇 언니를 아는 선생님들이

너는 왜 언니만큼 공부를 못하냔 소리가 쏙 들어갔다.


한 번 요령을 알고 나니 혼자 공부해 보려는 자신감과 용기가 생겼다.

시험 범위 안에서 내용들을 몇 번 읽다 보면 기억에 남았다.

사실 공부를 했다기보다는 벼락치기를 하며 요령만 생긴 거였다.

그런데도 성적이 쑥쑥 올랐다.

오르는 게 보이니까 또 하고 싶고, 수업 시간에 태도도 좀 더 집중하게 되었다.


생전 공부라곤 한 적 없는 애가 시험 기간이라고 거실에 불을 켜놓고 공부하고 있으니

다른 집 같으면 간식에 칭찬이 나와야 할 법도 했지만, 우리 집은 아니었다.


잠에 예민했던 엄마는 잔뜩 구겨진 얼굴로 불 꺼진 방에서 나와 짜증스럽게 말했다.

안 자고 뭐 하냐고. 네가 언니처럼 전교 1등이라도 할 거냐고. 불 끄고 잠이나 자라고.

그리고는 문을 쾅 닫고 들어갔다.

그때의 서러움과 당황스러움은 제쳐두고서도 그 말은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그런 내가 정말 성적표에 1등을 찍어보았다.

물론 그건 실업계 고등학교라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 경험은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었다.

아무도 나를 믿지 않아서 나도 나를 믿지 못했는데 처음 내가 나를 스스로 믿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엄마는 그 후 자신의 기억을 싹 고쳐서

본인이 교회에 기도를 열심히 했기 때문에 성적이 오른 것이라 했다.

나의 노력과 성과를 부정하고 기도의 응답이라는 이름으로 평가절하한 그 말은 또 한 번 큰 충격이었다.

어느 순간 엄마에게 연락이 오면 불안하고 불쾌했다.

또 무슨 말로 상처를 줄지, 그 말에 나는 또 무슨 말로 똑같이 상처 주는 말을 하게 될지.


엄마는 내가 결혼도, 출산도 해보지 않아 부모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이 더 화가 났다.

결혼도 출산도 해보지 않은 내가,

당장 옆에 있는 조카만 봐도 이해되지 않았던 일이 수두룩 했다.


내가 낳은 자식이 아니어도 저렇게 작고 여리고 귀한데,

그래서 엄마가 내게 했던 행동들이 더 이해가 안 되는데.

어째서 엄마는 그런 말을 당당하게 할까


역시나 다툼의 끝은 종교로 빠져버렸고 나는 지옥 불에 떨어질 예정인 믿음이 부족한 자였다.

지옥 불에 떨어질 게 가여워서, 무섭고 두려워서 그러는 것인데

엄마에게 나는 그런 깊은 마음도 생각하지 못하는 자식이었다.

자식이 죽어서 갈 지옥을 걱정하느라

살아있는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엄마를 나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교회를 버릴 수 없으니 각자 알아서 살자고 먼저 말한 것은 엄마였다.

나는 이미 오래전 엄마가 우리 가족보다 교회를 선택한 걸 알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언니들은 안 그러는데 너만 원망이 많았구나’ 하며 역시 내 탓을 하는 엄마에게,

가족들이 당신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교회 사람들이 얼마나 잘 챙겨줬는지는 잊지 않았던 엄마에게 나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게 내가 겨우 차린 인내였다.


연락하지 말자더니 몇 달이 지나 보내온 엄마의 문자에는 또다시 내 탓이 담겨있었다.

자신이 나를 낳을 때 얼마나 고생했는지와 건강이 좋지 않은 아빠를 내세워 네가 우리를 버렸다는 말로.

그렇지만 자신은 여전히 태도를 바꿀 수도 없고, 바꿀 마음도 없고, 너 또한 똑같다는 말로.


나는 기꺼이 불효자식이 되기로 했다.

그게 엄마 옆에서 듣는 폭언과 정서적 학대보다는 나았다.


사실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다.


엄마에게 가지고 있는 나의 감정은 사랑이 아닌 연민에 가깝다.

나는 엄마에게서 정서적 유대감이 없다.

오랜 시간 스스로 탐구하며 내린 눅눅한 결론이었다.


그렇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는 엄마가 있거나 있었고,

엄마라는 단어가 갖는 힘은 너무나 강력해서

내 사정을 일일이 설명하며 살 순 없는 일이었고

때때로 거짓말을 해야 할 때면 어쩔 수 없이 상처받았다.


그럼에도 나는

세상 가장 든든해야 할 엄마라는 단어를 상처로 안고서

나를 지키며 살아가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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