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딸

by 이음

엄마는 마흔두 살에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딸 셋 중 막내인 나는 그때 열다섯이었다. 가족 중 누구도 울거나 심각해지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 병이 엄마를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열다섯과 열여섯을 넘어가던 그때 엄마는 공릉동에 있는 원자력병원에서 유방 한쪽을 제거했다. 드라마에서 보던 암은 머리가 빠지고 얼굴이 창백해져서 힘없이 쓰러지고 무시무시한 병이던데 엄마의 암은 드라마 속의 그것들과는 달랐는지 머리도 빠지지 않았고 움직일 기력도 충분해서 수술 전이나 후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나는 허드렛일이라도 좀 도우라고 6인실 엄마의 병실에서 지루한 겨울방학을 보냈다. 갓 열여덟 살이 된 둘째 언니와 스물한 살이 된 큰언니보다는 내가 만만했을 테지만 나만 옴짝달싹 못 하고 병실을 지켜야 하는 게 불만스러웠다. 더군다나 엄마는 혼자 알아서 잘했고 내가 할 일은 거의 없었다.


집에 돌아온 엄마의 역할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가사를 도맡아 하며 자식과 남편을 챙겼다. 엄마는 책을 보고 식단관리를 하고 항암치료를 받으러 다니고 회복하는 과정을 온전히 혼자서 해냈다. 흰쌀밥을 좋아하는 남편은 콩이며 잡곡이 들어간 밥상에 한 번씩 불평을 쏟았고, 소시지 반찬을 원하는 자식들은 채소와 해조류 위주의 밥상에 실망했다.


속이야 어떻든 엄마의 겉모습은 멀쩡해 보여서 가족들은 점점 무뎌져 갔다. 새벽부터 고된 노동에 지친 남편은 퇴근길 소주 한 잔으로 심신을 달래느라 아내에게 무관심했고, 자식들은 새 학기 새로운 친구들과의 관계에 적응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엄마는 다녔던 절을 관두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의지가 되지 않았을 가족들에 더 외롭고 공허했을 엄마가 교회를 다니면서 밝아지고 건강해진 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가족과 다 같이 교회를 나가는 게 소원이라는 엄마를 위해 몇 번 교회를 나가기도 했지만 다섯 식구를 부양하느라 늘 고단한 남편은 쉬는 날 외출보다는 누워서 TV를 보는 게 더 행복했고, 교회에 나가는 것보다 친구들과 만남이 더 중요한 자식들의 마음은 시들해졌다.


종교가 엄마에게는 큰 힘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관심도 없는 가족들에게 종교를 강요하는 엄마의 행동은 오히려 종교에 대한 불신만 높아져 우리 집 불화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평범한 대화를 하고 싶었지만 무슨 얘기든 종교로 빠져버리는 엄마와의 대화는 내게 일방적이고 폭력적이어서 점점 대화하는 것을 피하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엄마는 완치 판정을 받게 되었고 우리 세 자매는 모두 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취업도 하게 되었다. 가끔 안부를 확인하는 것으로 멀어졌던 가족애는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다. 부모님과 떨어져 살다가 오랜만에 만나면 어느덧 늙어가는 부모님의 얼굴만큼 나도 조금은 철이 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타향살이를 하며 3평 남짓한 월세방에 누워서 이런저런 생각을 할 때면 가끔은 엄마가 암 수술을 했을 때 병실에서 퉁명스럽게만 대했던 나를 떠올렸다.


나는 서른 살에 부모님의 집에 다시 들어갔다. 처음으로 엄마와 둘이 와인을 마시며 속 깊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고, 중학교 때 이후로는 따라가지도 않던 시장을 같이 가기도 했다. 엄마와 함께 산책하다가 문득 암 진단을 받았을 때의 일을 물어본 적이 있다.


처음에는 수술할 생각이 없었다고 했다. 엄마는 유방암 초기 진단을 받았다. 수술할 형편이 안돼서라고 짧게 얘기했지만 많은 말이 압축되어 있었다. 고운 말 한번 없는 무뚝뚝한 남편이라도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어린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한 푼 두 푼 모았을 돈을 깨서 수술하기가 미안했을 것이다. 수술을 결심한 이유도 짧았다.

"너희도 아직 어린 게 아른거리고 해서."

나는 더 묻지 않았고 그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이미 옛일이 되어 무감각해져 버린 일인데도 나는 처음에는 수술할 생각이 없었다는 엄마의 말이 계속 마음에 맴돌았다. 겨우 사십 대에 들어선 한 여인이 수술만 하면 살 수 있는데도 삶을 포기하려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십이 년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삶이 얼마나 재미없고 고되기만 했기에 삶에 대한 미련도 갖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일까.


매일 술을 마시고 타박만 하는 남편, 사춘기에 들어선 아이들, 튼튼하지 못한 몸,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자리에 앉아서 부업을 해도 나아지지 않는 형편,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어떤 즐거움을 찾을 수 있었을까. 고작 TV 드라마로 삶의 고단함을 달래는 정도가 다였을 것이다. 그래도 가족이라고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서 좀 더 사는 쪽을 택했다.


외롭고 두렵고 무서웠을 수술을 끝내고 여성으로서 한쪽 가슴의 상실을 감내하기도 전에 병실에 앉혀놓았다고 철부지처럼 뾰로통한 아이를 보면서 엄마는 가끔 서럽기도 하였을 것이고 가끔은 그런대로 의지도 되었을 것이라 미루어 짐작했다.


여전히 우리 가족은 서로에게 무관심해 보인다. 고통도 나눌 수 있는 게 가족이니까 믿고 의지하면 삶이 좀 덜 버거울 텐데 내 고통을 다른 가족들에게 얹지 못한다. 겨우 서른 몇의 나는 가끔 사는 것이 한없이 우울하고 버거워서 모두 다 놓아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면 마흔둘에 정 없이 쌀쌀맞은 남편과 자식들을 놓지 못하고 고단한 삶을 꾸역꾸역 일으켰을 엄마의 마음을 생각한다. 엄마가 엄마의 고통을 홀로 견뎠듯이 나도 내 몫의 고통을 홀로 견디고 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취향에도 등급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