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준비해서 가는 사람이 얼마나 있어?”
내가 스물아홉 늦깎이 나이에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떠날 수 있었던 건 큰언니의 한마디였다. 늘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핑계로 미루면서도 살면서 한 번쯤은 해외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단순한 이유로 워킹홀리데이 도전은 몇 년 동안 내 버킷리스트에서 지워지지 않는 막연한 꿈이었다.
스물아홉은 어린 나이가 아니었다. 워킹홀리데이에 가려면 영어 실력을 쌓아 오든지 다양한 경험을 쌓아 오던지 이력서에 한 줄 쓸 스펙이 될만한 무언가를 건져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실패한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벌써 기회의 문은 좁아지고 있었고, 늦은 나이에 가는 만큼 절대 실패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준비되면 가겠다는 생각으로 미루다 보니 어느덧 워킹홀리데이가 가능한 나이 제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젊음의 패기로 떠나기보다는 직장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시기였지만 워킹홀리데이를 경험해보지 못한다면 평생 후회가 될 것 같았다.
영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향상해 오겠다느니 돈을 몇천만 원 모아 오겠다느니 하는 무리한 계획은 하지 않았다. 워킹홀리데이의 취지대로 현지에서 돈을 벌어 여행하고 비행기 값 이상의 돈은 까먹지 않는 것을 목표로 했다. 한국에서의 삶도 내게는 중요하니 겨울이 되기 전에는 돌아오는 것으로 스스로 타협했다.
막상 결심하고 나니 준비할 것은 많지 않았다. 신체검사를 받고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하고 여행 정보들을 수집했다. 비자가 나오는 대로 비행기표를 끊고 떠날 날을 기다렸다. 혼자서 국내 여행 한 번 해본 적이 없던 내가 얼떨결에 결심하고 일사천리로 일을 추진해버렸다. 떠날 날이 다가오자 후회가 되기도 했지만 이미 퇴사도 했고 친구들과 인사도 했고 살던 원룸도 정리해서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다.
나는 그렇게 호주에 갔다.
공항에 내려서 한인 백패커 사장님께 공항 픽업을 받아 숙소에 도착했다. 어찌어찌 시드니에 도착하긴 했는데 이다음부터는 여행책 하나 외에는 아무 계획도 없었다. 텅 빈 4인용 숙소 2층 침대 아래층에 짐을 대충 놓고 나는 일단 한숨 자는 것을 택했다. 다행히도 오후에 나처럼 막 시드니에 도착해서 두 번째로 우리 숙소에 들어온 한국인 동생을 만났다. 낯선 타국에서는 누군가와 말이 통한다는 것만으로도 의지가 되어서 우리는 금세 가까워졌다. 함께 숙소를 나와 첫 끼로 써브웨이에서 샌드위치를 사 먹고 유심칩을 사서 번호를 개통했다.
그렇게 나의 호주생활이 시작되었다.
평생 볼 일 없을 줄 알았던 오페라 하우스는 산책 삼아 수도 없이 보았고 한여름에 산타 모자에 비키니 가득한 해변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하버 브리지 위로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폭죽놀이를 감상하며 새해를 맞이했고 비키니를 처음 입어보았고 사막에 처음 가보았다.
이전의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들이었다. 수동적이고 낯가림이 심한 내가 당장 이 낯선 곳에서 어떻게든 살기 위해 먼저 사람들에게 다가가기도 하고 생전 처음 해보는 일도 마다하지 않고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생판 모르는 낯선 사람들과 살을 부대끼면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관광하며 나는 매일 조금씩 호주에서의 생활에 적응해갔다.
나는 반년동안 호주에서 번 돈으로 시드니와 울룰루와 멜버른을 여행했고 기념품과 약간의 용돈을 남겨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누군가에게 증명할 만한 스펙 한 줄은 없었지만 호주에 다녀온 후로 나의 삶의 태도는 더 나아졌다고 확신한다. 나는 한국에서의 삶이 기대되었다.
수줍고 겁 많던 내가 혼자서 호주 땅을 밟고 살아냈다는 것만으로도 대견했다. 새로운 일 앞에서는 지레 겁부터 먹고 포기하던 내가 마음만 먹으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내가 선택하고 내가 감당하는 경험은 내 인생을 주체적으로 사는 기쁨을 알게 해 주었다. 삼십여 년의 인생 중에 처음으로 온전히 내 인생을 산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목표가 무엇이었느냐에 따라 나의 경험이 누군가에게는 실패한 경험이 될 수도 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떠난 것만으로도 성공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호주에서의 경험이 내 삶에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는 가보지 않았다면 평생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하고싶은 일 앞에서 망설이는 누군가에게는 늘 하고 싶으면 그냥 하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매번 준비만 하다가 포기하려는 누군가가 있다면 완벽히 준비되어야만 떠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뭘 얻어오지 못할까 고민하지 말고 일단 떠나보라고, 일단 떠나보면 내가 뭘 얻게 될지 알게 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