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봄을 닮은 미소로 웃고 있었다
'제주도 한 달 살기', '베트남 한 달 살기' 등은 제목만 들어도 설레고 누구나 자발적으로 원하는 인생의 경험이다. 하지만 '학교에서 담임으로 딱 한 달 살기'는 새내기 교생이 아니고서는 학교에 몸담아 본 사람이라면 굳이 자원하거나 꿈꾸지 않는 경험이다. 그것도 3월, 8월 새 학기의 시작이 아닌 학년 막바지 10월의 새 임시 담임이 그렇다.
작년 10월, 가을이었다. 다급하게 2주간 중학교 시간 강사를 해줄 수 있냐는 친한 선생님의 연락을 받고 자칭 육아휴직으로 근무지가 없던 나는 그 부탁에 흔쾌히 응했다. 하지만 수업 결손만 메우는 일로 가볍게 수락한 일이 부담스럽게 커져버렸다. 친한 선생님이 근무하는 학교에 2주간 병가를 쓰기로 한 교사가 갑자기 수술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회복의 시간이 필요한 이유로 나더러 수업 시간 강사가 아닌 한 달 담임 기간제 교사를 해줄 수 있냐고 재차 연락이 온 것이었다.
너무 잘 알아서 더 피하고 싶은 것이 있다. 나름 학교에서 꽤 근무한 경력자로서 이것은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은 상황이었다. 10월 중순, 그것도 수학여행을 갓 다녀온 들뜬 아이들의 한 달 임시 담임을 맡는다는 것은 나에게 '막바지 투입자', 적응하다 끝나는 고생길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당장 대체자를 구해야 하는 선생님의 사연에 내 안의 '연민이'는 발동하였고 그 불편한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들였다.
한 달은 작심삼일 열 번이면 된다.
네다섯 번의 월요일을 만나면 된다.
그러면 한 달은 끝이 난다.
한 달간 교단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조종례 시간에 담임의 부재를 채우고, 시스템화되어있는 학급은 일상처럼 잘 돌아갈 것이니 나는 학생들의 출결 관리에 신경 쓰며, 내 수업을 열심히 해야지 하는 가벼움으로 첫 출근을 했다. 하지만 나는 천성이 맡은 일과 사람에게 마음을 쏟고 열정적으로 달리는 사람이다. 관성대로 아이들에게 마음을 주고 물들어가려고 애쓰다 보니 한 달간 2킬로가 빠졌다.
아이들은 한 달 임시 담임의 눈을 크게 속이지 않았고 늘 하던 대로 맡은 일들을 하여, 내가 참견하거나 잔소리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담임으로 교단에 투입된 나는 첫날부터 나약한 부적응자 같았다. 새로 만난 반아이들은 곧 정든 담임 선생님은 돌아오실 것이고, 나는 떠날 사람이니 내게 마음도 크게 주지 않았다.
ㅡ 한 달 살기 일지ㅡ
첫 일주일간은 긴장 속에 내 호흡이 차분히 가라앉지 않았다. 2년 만에 학교에 진입해 새 학교 건물, 시스템에 적응하는 것도 힘든데 학급 아이들의 이름을 외우고 신상을 파악하고, 업무 메시지를 확인하며 일을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두 번째 주부터는 2년간 끊었던 모카골드 믹스커피를 두 개씩 뜯어 수혈받듯이 먹었다. 학교란 곳은 하루에 믹스커피가 2번 이상 자동으로 타지는 곳이었다. 고작 일주일 만난 학생의 학부모 상담에, 뜻밖의 학생 가정 방문까지 일을 휘몰아쳐하니 퇴근 후 내 아이를 돌보다 밤 9시를 넘기지 못하고 잠들기 일쑤였다.
세 번째 주는 학생들과 작은 갈등들이 생겼다. 그전 선생님과 수업 스타일이 다르다는 둥, 그전엔 안 해서 안 하겠다는 둥, 큰 변화를 주지 않으려고 애썼으나 내 수업 방식을 밀고 나가려니 곧 나는 갈 사람이라는 것이 나를 가다가 멈추게 만들었다. 그래, 나는 곧 떠날 사람. 아이들을 위해 멈춘다.
네 번째 주부터는 호흡이 정상적으로 가라앉았다. 다른 반 교사들과 여러반 학생들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하고, 아이들과의 수업 호흡도 잘 맞아져, 내 매력에 빠진 아이들이 여럿 생겼다. 또 아이들의 짓궂음을 귀엽게 봐줄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거기 완전 동화되어 원래 있던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러면서 다가올 이별도 생각했다.
마지막 주에 학교 전체 행사가 있어서 강당으로 모인 아이들을 지도했다. 요란한 음악소리에 맞추어 댄스 공연이 진행되었고, 멋 부리는 남학생의 고성도 들렸다. 시끌벅적한 와중에 내 눈에 밟히는 우리 반 가녀린 소녀 소미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있었다. 큰 소리에 괴로워하는 그 아이를 데리고 강당 밖으로 나왔다.
소미는 학교 급식을 먹지 않았다. 들리는 소문에는 2박 3일 수학여행 동안에도 한 끼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앙상하게 마른 몸에 긴 생머리를 하고 큰 눈망울을 가진 소녀, 마스크로 얼굴을 반이나 가려 그 큰 눈만 유독 눈에 띄는 아이였다. 사람들이 묻는 말에 말없이 고개를 세로로 끄덕이면 "네"였고, 가로로 저으면 "아니요"인 소녀의 의사표현은 나름 확고했다.
강당 밖은 가을볕에 찬 공기가 데워져 따스했다. 소미에게 함께 걷자고 권하니 고개를 세로로 한번 끄덕였다. 나는 함께 걷는 동안 소미가 점심시간에 왜 급식을 먹지 않는지 그 길고 긴 사연을 직접 물어보지 않았다. 하교 후 어머니가 먹을 것을 잘 챙겨주신다는 것을 교내 상담 선생님을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곧 떠나는 마당에 소미의 삶에 갑자기 뛰어들어, 급식을 먹으라고 강요하기에는 한 달이라는 시간이 너무나 짧았다.
그런데 소미에게 따로 궁금한 것이 있었다. 나는 점심시간마다 교실을 둘러보며 혼자 있는 소미에게 간식이라도 줄까 하며 다가갔었는데, 그때 그림을 그리는 소미를 몇 번 봤었다. 걸음을 멈추고 소미에게 물어보았다. "소미야, 네가 그리는 그림이 엄청 궁금해, 선생님 며칠 뒤면 가는데, 네 그림 한 번만 보고 가면 좋겠다."라는 내 말에 소미의 고개가 가로로도 세로로도 저어 지지 않았다. 괜한 부담을 준 것 같아, 더 이상 말을 건네지 않고 조용히 둘이 운동장을 두 바퀴를 돌고 소미를 조용한 교실로 보냈다.
한 달의 끝, 마지막 종례를 위해 교단 앞에 섰다. 아침에 만난 아이들의 반응이 나만큼의 아쉬움이 보이지 않아, 한 달은 내 진심이 통하기 어려운 시간인가 보다 하고 씁쓸했다. 첫 만남 때 했던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역경'을 거꾸로 하면 '경력'이 되니 지금의 역경을 잘 견뎌내고 더 좋은 모습으로 성장하라며 훈훈하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때 반아이들이 갑자기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건네준 롤링페이퍼와 꽃다발. 깜짝 이별 파티를 하기 위해 나 몰래 나름 섭섭함도 숨기고, 편지도 숨기느라 애쓴 아이들이 고마웠다.
나도 한 달 담임으로 만나 정든 제자들과의 헤어짐 앞에 눈가가 촉촉해졌다. 주변에 모인 아이들을 부둥켜안고 토닥이고 있는데 소미가 쭈뼛쭈뼛 서 있는 게 보였다. 소미에게 다가갔더니 내 손에 길게 말린 두꺼운 종이 한 장과 동아리 시간에 받은 마카롱을 건네주었다. 소미가 꾸벅 인사를 하고서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소미와 그렇게 영영 멀어진 채, 나는 한 달간 도움을 주신 선생님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짐을 챙겨서 학교 밖으로 나왔다.
집으로 돌아와 탁상 달력을 보았다. 그 길었던 한 달이 넘겨져 있었고 한 달 동안 매일밤 하루를 마무리하며, 무탈하게 지나간 날마다 엑스 표시를 해둔 흔적들을 보았다. 한 달의 긴장을 버티며 진심으로 애썼다고 나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리고 소미가 준 두꺼운 종이를 펴보았다.
그것은 내가 보여달라고 부탁했던 소미의 그림이었다.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급식을 먹지 않아 늘 힘없고 어두워 보이던 소미를 걱정하던 한 달이었는데, 그림 속 소녀는 봄을 닮은 미소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파랑 치마에 노랑 운동화를 신고서 노란 병아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소녀, 그 미소에 소미를 그동안 걱정했던 마음이 한시름 놓였다. 소미는 밝고 건강하게 잘 지낼 것이다.
가다가 멈추는 짧고 굵은 한 달. 끝이 있음을 알면서도 끝이 없는 듯 마음을 쏟으며 달려가다가, 제자리로 돌아올 이를 위해 더 나아가지 않는 멈춤으로 나의 한 달은 그렇게 끝이 났다. 아이들에게 섣불리 다가가 익숙함을 깨트려서도 안되고, 돌아올 선생님을 위해 혼돈을 줘서도 안된다는 걱정과 불안으로 시작해서 적응과 훈훈한 마무리로 막 내린 단막극 같은 이야기가 내 교단 경력의 한 줄, 짧지만 큰 덩어리로 남았다. 어쩌면 나에게 기승전결로 완벽하게 남을 '학교에서 한 달 살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