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진정으로 "나쁜 것"인가?
“잔소리를 하는 엄마를 보며 화가 났어요. 순간 욕을 하고, 심지어 엄마를 잔인하게 때리는 상상까지 했어요. 내가 나쁜 아이가 된 건 아닌가, 죄를 지은 건 아닌가, 그 생각이 멈출 때까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요.”
“나쁜 의도를 가진 생각을 하면, 그것만으로도 나쁜 걸까요?”
강박장애를 앓는 환자와 나눈 대화다. 그의 사고는 늘 같은 자리에 맴돈다. 나쁜 의도를 품는 상상만으로도 자신이 나쁜 존재가 되어버린 듯 괴로워한다. 잠시 생각하다가 대화를 이어나간다.
“무엇이 나쁜 것인지에 대한 기준은 사실 참 모호해요. 단지 생각만 해도 나쁜 것일까요, 아니면 행동으로 옮겨야 나쁜 것일까요? 혹은 고의가 없었다면 결과적으로 누군가를 해쳤다 해도 그것을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선과 악은 늘 흑백이 아니라, 회색의 스펙트럼 위에 있죠.”
말갛고 해맑은 그의 얼굴은, 그가 간절히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생각한다.
“선과 악의 경계가 지금처럼 모호해진 시대가 또 있을까?”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불안의 기원』에서 현대사회에서 드러나는 악의 모호함을 짚어낸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어떤 행위가 악한지 판단할 때, 그 사람의 ‘의도’와 ‘동기’를 살펴왔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해치려 했다면 악하다고 말하고, 그렇지 않다면 설사 결과가 나쁘더라도 악이 아니라고 여겨왔다.
그러나 초연결의 시대, 악은 더 이상 그렇게 단순히 정의되지 않는다. 바우만은 정치사상가 장-피에르 뒤피를 인용한다. 누군가를 직접 살해하는 행위와, 부유한 국가의 국민들이 자기 안녕에만 몰두한 채 타인의 굶주림을 외면함으로써 발생하는 죽음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의도가 없더라도, 결과적으로 타인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
바우만은 말한다. 범인을 찾듯 동기와 의도를 추궁하는 것은 이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처한 곤경은 ‘누가 일부러 그랬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얽혀 있는 세계 속에서 생겨나는 파급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확실성과 모호함이 가득한 이 시대에 우리가 가져야 할 윤리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다른 존재에 대한 감수성이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는 타인의 삶, 심지어 의도와 무관하게, 부지불식간에 해를 끼칠 수 있다. 어떤 소비 습관은 누군가의 생존을 위협하는 구조에 가담할 수 있고, 무심한 말 한마디가 타인의 삶을 무너뜨릴 수 있다. 그렇기에 필요한 것은 “나와 다른 존재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다.
다른 존재에 대한 감수성이란, 내가 고립된 점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존재들과 얽혀 있다는 인식이다. 그리고 그 연결 속에서 내 행동 하나가 미치는 파급력을 끊임없이 성찰하려는 태도다.
나는 이것이 곧 연존감의 윤리적 차원이라고 생각한다. 자존감이 “나를 존중하는 감각”이라면, 연존감은 “다른 존재와 연결되어 있는 나를 존중하는 감각”이다.
의도가 있든 없든, 우리의 행동은 언제나 연결망을 타고 흘러가 누군가에게 파급된다. 그렇기에 오늘의 작은 선택이 내 곁의 누군가에게,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에게 어떤 결과로 닿을 수 있는지를 상상하는 일, 바로 그 감수성이 새로운 윤리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선악의 경계가 희미해진 시대, 우리는 “나는 나쁜가, 좋은가?” 라고 묻는 대신에
조금은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연결된 다른 존재들에게 어떤 영향을 만들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