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든 지원을 받을 수 있을까 해서 주민센터를 찾았는데, 그때 직원의 눈빛과 말투를 기억해요. 저도 이해해요. ‘어쩌다가 이렇게 살고 있을까’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겠죠.”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질환으로 인해 일상을 유지하기 어렵고, 그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다. 가까스로 버티던 직장을 떠나야 할 때도 많고, 생활비를 이어가기 위해 국가의 복지 제도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모멸감과 마음의 상처를 경험한다. 그들의 상처는 단지 ‘가난’ 때문이 아니라, 도움을 요청하는 순간 존중받지 못했다는 감각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근대 계몽주의 이래로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선언 아래 살아왔다. 누구나 인간이라면 존중받아야 한다는 명시적 믿음 속에서 말이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는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을까?
보통 말은 우리의 의식적인 생각을 드러내지만, 태도와 말투, 시선은 무의식적인 믿음을 반영한다. 복지 현장에서, 진료실에서, 누군가의 말투나 표정 속에 “존중은 조건부로 주어진다”는 암묵적 신념이 숨어 있을 때가 많다.
리처드 세넷은 『불평등 사회의 인간존중』에서 말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존중은 성과, 효율, 기여와 같은 경제적 척도에 따라 배분된다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고, 희소한 노동을 하는 사람은 존중받지만, 돌봄과 지원이 필요한 사람은 존중 대신 동정이나 멸시를 받기 쉽다. 그렇게 존중은 공평한 권리가 아니라, 성과에 따라 나누어지는 특권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도 완전한 자립으로 살 수 없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돌봄 속에서 자라났고, 언젠가는 누군가의 돌봄을 받으며 생을 마감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서로의 노동과 존재에 기대어 살아간다. 의사와 공무원, 환자와 민원인은 서로의 삶을 가능하게 만드는 관계망 속에 있다.
즉, 나는 환자 덕분에 ‘의사’로 존재하고, 공무원은 도움을 요청하는 이들 덕분에 ‘복지 담당자’로 존재한다. 우리가 서로의 삶을 존재하게 만드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존중은 시혜나 도덕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인식이 된다.
진정한 존중은 “저 사람도 나처럼 중요한 인간이다”라고 생각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그 사람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관계적 자각에서 비롯된다.
존중이란 결국, 연존감의 또 다른 이름이다.
나와 너의 삶이 서로의 조건임을 아는 감각,
그 감각에서부터 비로소 진정한 존중이 시작될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