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과연 자유로이 달리고 있는가

by 심연온


요즘 너도 나도 달린다.
나도 어느새 유행에 이끌려 달리기를 시작했다.

다른 운동은 늘 숙제하듯 억지로 했는데, 러닝은 조금 달랐다. 기록을 확인하며 매번 조금씩 빨라지고,

거리가 늘어나는 걸 눈으로 확인할 때마다 조금 더 나은 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작은 성취감이 내일의 나를 또 운동화 끈 앞으로 이끌었다.


“달리기는 몸에 좋은 유산소 운동이니까.”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그러다 달리기 모임에 들어가면서 기록을 SNS에 올리고 서로의 인증을 확인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그 무렵부터 나는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더 빠르게, 더 멀리, 더 오래 달리고 싶었다. 그렇게 한 달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달린 끝에 결국 내 발목은 퉁퉁 부어버렸다.


깁스를 한 채 침대에 누워 문득 생각했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달렸을까."







누가 나를 그렇게 몰아세웠을까.

어쩌면 러닝은 자본주의 정신을 가장 세련된 형태로 체현한 운동일지도 모른다. 표면적으로는 자유롭게 달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 통제의 윤리에 따라 움직이는 내면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몸을 관리하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고, 의지를 단련하는 사람.
러너는 언제나 그런 이미지로 상징된다.

‘나는 게으르지 않다’, ‘나는 나를 통제할 수 있다.’
이 문장은 곧 현대 사회의 새로운 도덕이 되었다. 그리하여 달리는 몸은 단순한 신체가 아니라 성과를 내는 신체, 스스로를 증명하는 신체,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자산으로서의 신체가 된다.






스마트워치, 러닝 앱, SNS 인증, GPS 기록…

우리는 뛰는 순간조차 기록되고, 측정되고, 순위화된다. 몸의 감각은 점점 희미해지고, 숫자와 그래프만이 남는다. 그 순간 러닝은 경험이 아니라 성과가 된다.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있는 건강,

관리되고 경쟁력 있는 몸,
노동 시장에서 유리하게 작동할 수 있는 자기 브랜드.
건강조차 교환가치가 되는 시대,
달리기는 “자기 투자”의 완벽한 형식이 되어버렸다.






부은 발목을 부여잡으며 나는 다시 묻는다.


"나는 과연 자유로이 달리고 있었을까."


그러나 여전히, 작지만 분명한 자유의 가능성은 남아 있다.

기계로 측정되지 않는, 나만의 고유한 몸의 리듬을 찾아가며 달리는 것

때로는 속도를 늦추거나 멈추고, 기록하지 않고, 비교하지 않은 채

그저 바람의 결을 느끼며 달리는 것

그 때 자유의 문이 비로소 슬며시 열릴지도 모른다.

그 안에 작지만 단단한 오롯한 나만의 자유가 있을 것이다.



온전히 자유로운 달리기란

‘더 빨리, 더 멀리’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 몸이 어떤 감각을 내는지 듣으며 달리는 것이다.

그것이 몸의 자율성을 되찾는 첫 걸음이 아닐까.



효율이 아니라 감각으로,
성과가 아니라 리듬으로 살아가는 일.
그 작은 전환이 어쩌면
이 시대의 진짜 자유로움을 향한 저항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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