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는 홀로 치유되지 않는다.

by 심연온

요즘은 스스로 “트라우마를 입은 것 같다”고 말하며 진료실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정신의학의 관점에서 트라우마는, 단순히 무서운 일을 겪었다는 것을 넘어
자신과 타인, 세계에 대해 가지고 있던 기본적인 신념이 통째로 흔들릴 만큼의 심리적 충격을 말한다.


트라우마라는 단어가 일상의 언어가 된 것은,
그만큼 우리 삶에 충격적 사건이 많아졌다는 뜻일 수도 있고, 심리적 고통을 드러내는 것이 예전보다 덜 부끄러운 일이 되었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는 이러한 고통을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로 진단하기도 한다.
진료실을 찾는 사람들 역시 질문한다.


“이게 PTSD는 아닌가요? 치료로 나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수년 동안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을 만나고 연구해오면서,
나는 도리어 그들에게 병명을 붙이는 일을 머뭇거리곤 한다.

병명을 붙이는 순간, 그 사람의 고통은 의료의 문제로 쉽게 환원된다. 그리고 의료화된 고통은 곧 개인이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된다. 진단은 환자를 돕기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이 고통은 당신의 몫입니다”라고 말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트라우마는 결코 혼자서는 회복되지 않는다.

트라우마의 치유는 진료실 안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회복의 큰 부분은 진료실 밖에서,
그 사람이 다시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트라우마 연구자들은,
사람이 심리적 충격을 견디고 치유되기 위해서는 ‘공감적 청중(empathic witness)’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개념은 심리치료에서 출발했지만, 이제는 사회학·기억연구·인류학에서도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다.


공감적 청중이란 누구일까?

그들은 특별한 치료기법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판단하지 않고, 서둘러 조언하지 않고, 고통의 크기를 축소하지 않고, 그 사람이 겪은 일을 “실재하는 일”로 인정해주는 그런 사람을 말한다.

누군가가 겪은 고통을 “네가 겪은 일은 분명 현실이었다”고 세상에 증언해주는 사람, 그런 존재가 곁에 있을 때 트라우마는 비로소 회복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트라우마 치유는 결국 관계 속에서, 공동체 속에서, 타인의 응답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한 응답이 있을 때, 우리의 고통은 더 이상 혼자의 문제가 아니다.

고통을 나누고, 증언하고, 들어주는 공동체가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치유의 방향을 찾을 수 있다.


트라우마는 홀로 치유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말은 곧, 우리는 서로의 회복을 위해 필요한 존재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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