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선생님은 환자를 배려하지 않는 거죠? 이런 식이면 제가 선생님을 어떻게 믿죠?”
그녀는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나는 순간 당혹스러웠다. 진료 과정에서 그녀가 요구한 모든 것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요구하신 부분 중 몇 가지는 의사의 고유한 판단이 필요한 영역이에요. 환자를 보호할 의무도 있지만, 저는 저 자신을 보호할 수 있어야 환자에게 더 잘할 수 있습니다. 저를 믿어주시고, 제 입장도 조금은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피해자라구요. 피해자의 요구를 이렇게 묵살할 수 있나요?”
그 순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성폭력으로 인해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 경험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고, 트라우마는 이제 그녀의 정체성마저 잠식하고 있었다.
‘성폭력 피해자’라는 말은 더 이상 그녀의 경험을 설명하는 하나의 언어가 아니라, 그녀 자신을 규정하는 말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정체성은 점점 그녀의 삶 전체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녀와 대화하며, 영화 "밀양"을 떠올리게 된다.
영화 속 주인공은 아이를 잃은 어머니이다. 그녀는 어느 누구보다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다고, 아니 용서할 수 있는 권리와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게 된다.
그러나 나는 그 장면을 보며 이런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피해자는 가해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 사실만으로 피해자는 도덕적으로 더 높은 자리에 서게 되는가. 피해자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그에게 타인을 단죄하거나 처벌할 권리, 혹은 무한한 배려를 요구할 권리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인가?
어쩌면 피해자가 입은 가장 치명적인 피해는,
피해자라는 정체성 이외에 다른 어떤 자리도 가질 수 없게 되는 상태인지도 모른다.
피해자라는 정체성이 삶의 전부가 될 때, 그 정체성은 보호막이 아니라 감옥이 되기도 한다. 그 자리는 사람을 세상으로부터 고립시키고, 타인과의 건강한 소통을 어렵게 하며, 결국 트라우마로부터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게 만든다.
나는 가끔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우리는 피해자를 보호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피해자라는 자리에 머물도록 붙잡고 있는 것일까.
회복이란 피해자가 아니게 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였던 자신이 피해자 너머 자기 자신을 삶 속으로 확장시키는 일인지도 모른다.
트라우마는 결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삶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넓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