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뒤르켐을 기다리며
“선생님, 안 됩니다. 저 퇴원시켜 주세요.
이렇게 있으면 병원비가 더 드니까 더 힘들어요.”
그는 사업 실패 이후 갑작스러운 경제적 파탄을 겪었다. 일용직을 전전하며, 버텨보았지만 돌파구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절망 끝에 자살을 시도했고, 응급실에서 깨어났다.
깨어난 그에게 나는 정신과 입원을 권했다. 다시 시도할 가능성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그는 말했다.
“제가 지금 필요한 건 입원이 아니라 돈이에요.
입원하면 빚만 더 늘어요.
오늘도 일하러 나가야 해요.
선생님, 저 좀 살려주세요.”
방금 자살을 시도한 사람의 입에서 “살려달라”는 말을 듣는 아이러니한 순간,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입원을 시키면 당장의 위험은 막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퇴원 후 감당해야 할 수백만 원의 병원비는 그를 다시 절망으로 밀어 넣지 않을까.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 정말로 ‘마음’ 하나뿐이었을까.
우리는 자살을 말할 때 거의 자동적으로 정신질환을 떠올린다. 정신질환이 자살의 중요한 위험요인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모든 자살 시도자가 정신질환자는 아니며, 모든 정신질환자가 자살을 시도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 정책은 대개 정신건강의학의 언어로만 짜인다.
위험군 선별.
조기 진단.
치료 접근성 강화.
물론 필요한 일들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한가.
19세기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자살론』에서 자살을 개인의 병리로만 보지 않았다.
그는 사회적 통합과 규범의 붕괴, 즉 사회 구조의 변화가 자살률에 영향을 미친다고 분석했다.
21세기를 사는 정신과 의사의 눈으로 보면 뒤르켐이 분석한 19세기의 자살 양상은 오늘날과 다르다.
그러나 바로 그 “다름”이 자살을 개인의 병리로만 환원할 수 없다는 증거는 아닐까.
자살은 시대에 따라 모양이 달라진다. 사회가 변하면 자살의 패턴도 변한다.
그렇다면 자살은 개인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사회 구조의 문제이기도 하지 않은가.
대한민국은 오랫동안 OECD 국가 중 높은 자살률을 기록해왔다.
막대한 예산과 정책, 수많은 전문가들의 노력에도 수치는 쉽게 낮아지지 않는다.
왜일까.
한국인이 생물학적으로 더 취약해서일까.
우울증에 더 잘 걸리는 유전자를 타고나서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경쟁적인 사회 분위기,
극심한 경제적 양극화,
사회적 유대의 약화.
전문가들조차 이러한 사회적 요인을 지적한다. 그러나 정책은 여전히 개인의 치료와 관리에 집중된다.
우리는 개인을 치료하면서 그를 벼랑 끝으로 밀어 넣는 구조에는 얼마나 질문하고 있는가.
저출산을 사회 문제라고 말한다면, 생산 가능 인구의 감소를 국가의 위기라고 말한다면,
사망 원인 상위권에 늘 자리하는 자살 역시 사회적 문제로 다루어야 하지 않을까.
자살을 줄이기 위해서는
정신의학뿐 아니라 사회학이 필요하다.
그리고 어쩌면
그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자살을 개인의 병리와 실패로만 읽지 않겠다는
우리 사회의 태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