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해력" 있는 사람일까?

by 심연온

“이제 팀장님 목소리만 들어도 깜짝깜짝 놀라요. 그분이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하고 바라기도 해요.”


그녀는 얼마 전 큰 실수를 했다. 그 실수 때문에 하마터면 회사의 중요한 계약이 날아갈 뻔했다.

그날 팀장은 다른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그녀를 심하게 질책했다.

사실 그 실수는 처음이 아니었다.
팀장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녀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그날 묵은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듯했다. 그 날 그녀는 “이렇게 계속 실수하면 회사에서 버티기 어렵다”는 말까지 들었다.


그 일 이후 그녀는 팀장을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하는 것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생각이 복잡해졌다.

그녀가 겪은 모멸감은 분명 현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생각도 떠올랐다.


만약 내가 그녀의 동료였다면 어땠을까.

반복되는 실수를 수습하다 보면 나 역시 짜증을 내거나 언성을 높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얼굴을 찡그리거나 건조한 말투로 업무를 지시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동료들의 그런 “미묘한 뉘앙스”들이 자신에게 큰 모멸감을 주었다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듣자 문득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내 동료들에게 그런 "미세공격성의 언동" 을 보이지 않고 있는가.


단지 일이 조금 느리거나 내 기대만큼 성과를 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나 역시 누군가를 은근히 무시하거나, 무례하게 대하지는 않았는가?

그 사람이 성과를 내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타인에게 짐이되는 유해한 사람이므로, 무례하게 대하는 것이 정당화 될 수 있을까?

반대로, 성과와 경쟁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눈부신 성취를 이룬 사람은 무해한 것을 너머 세상에 유익한가?

그 성취의 과시가 누군가에게 열등감과 좌절을 불러일으켜, 누군가가 마음을 "긁혔다"면,
그는 여전히 무해한 사람일까.


.내 동료들이 완벽하지 않듯 나 역시 완벽하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내 동료들의 삶을 모른다.

그들이 어떤 역사를 지나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누구에게나 다정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누구에게나 예의 바를 필요는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원치 않는 친절은 때때로 무시가 될 수 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친절은 상황에 따라 상대에게 모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예의는 다르다.
예의는 상대를 나와 같은 존재로 대하는 최소한의 방식이며, 그 자체로 존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작년에는 “무해력”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누군가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사람,
존재 자체로 편안한 사람.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이미지는 아마도 푸바오 같은 존재일 것이다.
귀엽고, 순하고, 누구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는 존재.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완전히 무해한 존재일 수는 없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존재다.

말 한마디로, 표정 하나로, 혹은 무심코 던진 농담으로도 누군가를 깊이 아프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어쩌면 진정한 무해력은
타고나는 성격이나 이미지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존재임을 알고
그 상처를 줄이기 위해 애쓰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완전히 무해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조금 덜 상처 주는 인간이 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은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애씀의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서로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가장 현실적인 형태의 무해력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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