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자아'의 탄생

by 심연온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살 가치가 없는 사람이에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생산적인 일을 하지 못하잖아요. 저는 쓸모 없는 사람이에요.”


진료시에서의 이런 대화는 늘 진부하고, 당연한 듯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순간, 눈 앞에 있는 환자를 잃을 지도 몰라, 등골이 서늘해진다. 어떻게든 그가 삶을 이어나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내가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꺼낸 말이라곤 고작 그가 한 말에 대한 상투적인 반문이다.


“쓸모 없으면 왜 죽어야 하나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우리는 늘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를 쓸모로서 증명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 자신을 증명하지 못한다는 것은 곧 스스로가 무가치한 존재라는 사실을 반영한다는 신념을 당연하게 여겨왔다.


그 신념은 근대의 시작과 함께 서서히 뿌리 내려온 사고방식의 중심에 자리 잡은 “자아”라는 관념에서부터 출발한다. "자아"는 세상 속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끊임없이 측정하고 평가 내린다. 그런 자아의 존재를 우리는 늘 당연하게 여긴다. 하지만, “자아”는 타고난 것이 아니다. 뇌과학이 눈부시게 발달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도 “자아”에 해당하는 신경생물학적인 기반조차 불투명하다. 어쩌면 “자아”는 근대의 태동과 함께 만들어지고, 강조된 개념인지도 모른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하며, 나라는 존재가 있음을 선언했다.

지금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지는 그 말을 데카르트는 왜 새삼스럽게 했을까? 어쩌면 데카르트 이전의 시대에서 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라는 존재보다는 “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근대 이전의 사람들은 신에게 귀의하는 삶을 살았다. 세상과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닌 신이었다. 좋은 삶이라는 것은 신의 뜻을 따르며 살아가는 삶이었다. 그렇게 신의 뜻을 따라 살아가다 보면, 삶을 너머 죽음 뒤에 평화롭고 풍요로운 내세가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데카르트를 비롯한 근대인들은 점차 신의 존재를 부정하며, 그 반열에 인간,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나”를 올려놓기 시작했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했다. 세계도, 감각도, 심지어 자신의 몸도.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의심 속에서도 의심하고 있는 '나'의 존재는 남겼다. 그는 이 ‘의식하는 나’, ‘생각하는 나’를 존재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렇게 세계와 신이 중심이던 질서가, '나'로 중심을 옮겨 간 것이다.




모든 것의 출발점이 ‘나’로 바뀌자, 삶을 바꾸는 것도, 그리고 그 너머 세상을 바꾸는 것도 결국은 내가, 그러니까 “자아”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운 좋게도 인생에서 원하는 대로 살아나갈 수 있었던 사람은 “자아”에 자부심이라는 왕관을 장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운 나쁘게도 인생을 원하는 대로 살수 없었던 사람은 “자아”에 죄책감과 수치심이라는 멍에를 짊어졌다. 삶은 온전히 “자아”의 것이었다. 생산적인 일을 하지 못하는 불운을 타고나서 세상에 쓸모가 없어진 상태가 된 것은 이제 온전히 “자아”의 책임이 되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다시 그 당연한 사실에 반문하게 된다.


“세상에 쓸모가 없다는 것은 오롯이 당신의 책임인가요?”

“대체 쓸모는 누가 결정하는 거죠?”

“당신이 사라지면, 세상은 어떻게 되는 거죠?”


솔직히 말해서, 이 따분한 반문에 대한 답은 전혀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언제, 어디에서건 홀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나의 존재 가치는 오롯이 내가 결정할 수가 없다. 나는 늘 무엇인가,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고, 나의 사라짐은 그저 나의 사라짐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늘 쓸모 없어져서 혼자가 되었다는 그들에게 그렇게 반문하고 싶었다.


그들이 없어진 세상은 결코 그들이 있던 세상과 같지 않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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