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새벽마다 달리기를 하곤 한다.
어느덧 입추가 지나자 조금 더 어둑어둑 해진 새벽의 공기는 한결 서늘해졌다.
새벽의 공기 속에 달리는 내 몸이 바람을 만들어낸다. 서늘해진 공기를 마셨다가 뱉어내며, 그렇게 나는 새벽의 공기 한 가운데서 내 몸이 만들어낸 바람을 즐겨본다. 그렇게 나는 앞으로 나가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달리고 달려도 그래 봤자 새벽 공기의 품 안일뿐이다. 나는 품 안의 어린아이 마냥 내 몸이 만들어내는 바람에 신기한 듯 마음껏 버둥거려 달려본다. 어느덧 어둑어둑한 하늘이 붉그스름하게 변한다. 새벽의 공기에도 태양의 입김이 불어온다.
다시 달리고 또 달린다.
어느 덧 태양이 떠오르고, 태양의 입김에 구슬땀이 흐르고, 온 몸에 열기가 오른다. 어느 새 따뜻해진 공기를 마셨다가 뱉어내며, 내 몸이 뜨듯한 바람을 만들어낸다. 등줄기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히더니 어느덧 비오듯 쏟아진다. 이마의 땀이 뚝뚝 땅으로 떨어진다.
땅에는 아침부터 부지런하게 일하고 있는 개미들이 달리는 내 발을 피해 부산스레 움직이고 있다. 어제 누가 먹다 버린 젤리조각인지, 개미들은 열심히 먹이를 어딘가에 운반하고 있다. 그렇게 자그마한 세상이 달리는 내 발 밑에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발을 조심하며 그들의 세계를 피해 달린다.
다시 고개를 들어 달린다. 앞에 나와 비슷한 연배의 여자가 엉거주춤 뛰고 있다. 저 여자는 뛰는 것일까 달리는 것일까, 그녀의 굼뜬 움직임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해본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도 그녀를 따라잡을 수가 없다. 그녀를 보자마자 별다른 이유 없이 그녀를 따라잡고 싶어졌다. 있는 힘껏 속도를 낸다. 달리고 또 달려서 달리는 그녀를 따돌린다. 뒤를 바라보니 그녀는 정작 차분한 얼굴로 걷고 있다. 돌연 무릎이 시큰거린다.
나는 왜 굳이 그녀를 따라잡으려 했을까.
다시 달린다. 냇가에는 오리가족이 유유히 사냥을 하고 있다. 저 멀리 왜가리가 날아오르는 모습도 보인다. 몇 년 전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사는 이 곳 근처는 탐조의 명당이라 불릴 만큼 다양한 새들이 보여 살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새들이 모여 사는 곳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서로의 터전과 습관, 숨결을 얽히고 설키며 지켜왔을까.
다시 달려본다. 저 멀리 신축 아파트가 빽빽히 들어선 것이 보인다.
천정부지로 오르는 집값을 보며, 진작 저 아파트를 샀었어야 한다고 후회해왔다. 그러면서도 몇 년 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오래된 아파트의 미래를 상상한다. 재건축이라는 것은 단순히 오래된 아파트가 허물어지고 새 아파트가 들어서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30여년이 넘게 자라온 아름드리 메타세콰이어 나무의 생명을 빼앗고, 거기에 살고 있던 새들의 보금자리를 앗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나무와 새들이 사라진 곳이 지금과 같은 곳일지 알 수는 없다. 그리고 다른 존재의 보금자리를 강탈한 자리에 세운 으리으리한 아파트에서 과연 우리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우리는 늘 나의 기록과 속도, 나의 목표와 성취만을 향해 달려왔다.
그러나 그러한 달리기가, 나와 연결된 수많은 존재들을
서서히 지워버리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다른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즉 연존감은, 나를 독립된 점 하나로만 보지 않는다.
내 발 밑의 개미, 하늘의 새, 나무와 냇물, 그리고 곁을 스치는 사람까지—
그 모든 존재와 얽혀 있는 나를 바라보는 감각이다.
그 감각이 깨어날 때, 우리는 속도보다 방향을,
경쟁보다 관계를, 독점보다 공존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자신을 위해, 그리고 우리자신 너머 다른 존재를 위해
연결되어 존재한다는 감각, 연존감을 알아차리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