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전화벨 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쿵 내려앉아요. 손발이 덜덜 떨려서 진정이 잘 안 돼요.”
그녀는 몇 년째 공공기관에서 민원 전화를 받는 일을 해왔다. 매일 쏟아지는 불만과 항의 속에서 하루 종일 몸을 곧추세우고 버텼다. 퇴근길엔 힘이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저녁이 이어졌다. 어떤 날은 허기를 달래듯 폭식을 하고, 또 어떤 날은 충동처럼 온라인 쇼핑을 했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 몇 달간 약를 먹고 상담을 받았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 정신과 의사가 그녀에게 내린 진단은 ‘우울증’이었다. 그러나 병가를 내고 업무에서 잠시 벗어나자, 그녀의 얼굴은 거짓말처럼 조금씩 밝아졌다. 햇살 좋은 날이면 동네를 산책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일터로 돌아간 순간, 그 어두운 그림자는 재빨리 되살아났다.
우리는 흔히 고통의 이유를 ‘개인’에게서 찾는다.
유전적 취약성, 감정을 억누르는 성격, 마음의 습관들. 물론 그것들도 원인이 된다.
하지만 그녀에게 가장 무거운 짐은, 매일같이 겪어야 했던 민원 업무였다.
어떤 고통은 개인의 성격이나 기질보다도, 감당하기 힘든 환경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더 이상 의료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몫이 된다.
정신과 진료실에 앉아 있으면, 늘 한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그 얼굴 너머엔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풍경이 겹쳐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이 ‘의료화’되는 순간, 그것은 쉽게 개인의 문제로 축소된다.
고통이 의료의 이름을 달게 되는 순간, 연대의 가능성은 희미해지고, 각자의 몫으로 떠넘겨진다. 우울증과 자살률 통계가 오를 때마다 우리는 너무 쉽게 그것을 ‘정신건강의 문제’로만 환원한다. 마치 복잡한 그림 위에 단순한 색을 덧칠해버리는 것처럼. 고통을 의료화하는 것은 현대사회가 곤경에 처하거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개인을 다루는 가장 편리하고 단순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근대가 태동할 무렵 영국 런던을 떠올려 본다.
상수도의 위생이 나빠 콜레라가 퍼지는데, 그저 개인의 면역력만 올리려 한다거나 항생제만 처방하는 상황을 생각해본다. 근본적인 위생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환자는 계속 생겨날 수 밖에 없다. 콜레라를 치료하는 것은 의료의 영역이지만, 근본적인 원인인 위생적인 상수도 관리를 개선하는 것은 사회적 문제이다.
우울증과 불안장애도 비슷하다.
경제적 양극화, 불안정한 일자리, 과도한 업무와 낮은 보상. 이런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고통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개인의 회복탄력성을 키우고, 항우울제를 처방하며, 심리상담을 지속한다 한들, 고통을 줄이려는 사회적 노력이 없다면 우울증과 불안장애는 더욱 더 늘어날 것이다. 치료는 의료의 몫일지 몰라도, 원인을 줄이는 일은 사회의 몫이다.
가끔은 환자에게 말하곤 한다.
“힘들면 언제든 오세요. 주저하지 말고.”
아마 나의 얼굴도 그 말 속에서 순진하게 빛났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문득 생각한다. 모든 고통을 내가 짊어지겠다는 선의가, 오히려 환자들을 더 깊은 ‘각자도생’의 늪으로 몰아넣는 건 아닐까.
어떤 고통은 병명으로 불리기 전에, 사회의 이름으로 불려야 한다. 함께 짊어져야 할 몫으로 남아야 한다.
그렇게 사회의 언어로 불릴 때, 비로소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