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곡동 블루스(2)

전세사기에서 살아남기-곰달래로

by 홑들

(첫 번째 '초록마을로 3길' 이야기에서 이어집니다.)


#2. 곰달래로

그렇게 첫 번째 집을 탈출하면서 모든 액땜을 마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화곡동은 그리 만만한 동네가 아니었다. ‘설마’ 하는 안일함, 험난했지만 보험 덕분에 그래도 첫 번째 집을 잘 통과해왔다는 오만함, 2년을 계약했지만 1년만 살고 나갈 계획이니까 혹시 사기를 친대도 건물에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 무탈하게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이기심 등은 여지없이 내 뒷덜미를 잡아챘다.

나보다도 훨씬 어린, 순진하고 성실하게 생긴 중개보조원은 말을 번드르르하게 하는 닳고 닳은 중년보다 믿음이 갔다. 몇 군데의 집을 함께 보러 다니면서 그럭저럭 유대감도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순진해빠지고 물정 모르는 건 나였다. 누가 누굴 판단해. 지난번과 너무나 유사한 패턴에 계약을 망설이는 내게 그는 연신 바쁘게 전화 통화를 하며 말했다. “어제 보고 갔던 사람이 계약하고 싶다고 하네요. 지금 안 하시면 집 금방 빠져요.”

두 면이 통창으로 되어 있는 그 집을 보고, 절대로 구매하진 않겠지만 한 번쯤 살아봐도 좋을 집이라는 생각을 한 것도 어리석었다. 바깥을 보면 얼마나 보고 산다고. 몸 어딘가에서 배앓이를 할 때 같은 불안불안한 느낌이 들었지만, 애써 그 경고음을 무시했다. 그리고 늘 그렇듯 직감을 무시한 대가는 너무나 컸다.


paul-zoetemeijer-AtxeOe04PQ8-unsplash.jpg 나쁜 예감은 비껴가는 법이 없지 (사진: 사진: Unsplash, Paul Zoetemeijer)


“새로 계약하는 임대인은 어떤 사람인가요?”

“엄청나게 사업을 크게 하는 사람이에요. 걱정할 것 하나 없어요.”

건축주와 계약을 하고, 며칠 있다가 새로운 임대인과 다시 임대 계약을 하러 가면서 부동산 중개인에게 물었을 때, 그는 얼마나 자신만만했던가. 이전의 경험치를 기반으로 이번에는 새 임대인의 세금 체납 여부까지도 꼼꼼하게 확인한 터였다.

그렇게 안전을 기했건만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이사 의향을 전하면서 몇 번의 통화를 한 끝으로 임대인과는 연락이 전혀 닿지 않았다. 수십 번, 수백 번 전화를 걸어도 응답이 없는 것을 보고 올 것이 왔구나, 예감은 비켜 가는 법이 없구나 싶었다. 혹시 몰라 일찌감치 이사 통보를 하고, 만일을 대비해 통화 녹음도 한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또다시 허그를 통해 전세 보증금을 돌려받아야 한다니, 생각만으로 벌써 가슴이 턱 막혔다. 더구나 당시는 몇 년간 부동산 가격이 미쳐 날뛰고 이를 잡겠다고 부동산 정책도 몇 번이나 바뀌던 때였다. 이에 발맞춰 전월세와 관련된 제도도 계속해서 생겨났다. 전세 사기가 워낙 기승이라 허그에서 전세금을 반환해주는 기준도 달라졌다는 이야기까지 돌았다. 집을 둘러싼 온갖 이슈가 시끄럽고 복잡하게 돌아갔다.

집을 둘러싼 온갖 복잡한 이슈에 갇힌 기분 (이미지: Unsplash, Maksym Kaharlytskyi)

지난번에 해봤으니 이번에는 수월하게 서류를 준비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헛되고 헛됐다. 건축주와 처음 계약을 했을 때 확정일자를 받아둔 상태였다. 그리고 집주인이 바뀐 다음에는 계약서는 썼지만 확정일자는 따로 받지 않았다. 동사무소에서 이전 것으로 갈음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택임대차 신고제가 시행됐고, 나 역시 시일에 맞춰 인터넷으로 임대차 신고를 했는데 그때 자동으로 확정일자가 한 번 더 부여됐다. 혹시라도 확정일자가 최신 것으로 업데이트된 건 아닐까? 불현듯 그 생각이 들고부터 배가 싸하던 불안은 기어코 심장이 쿵쾅거리는 공황으로 변했다.

그뿐 아니다. 임대사업자라면 임대인보증보험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는 제도가 2020년부터 시행됐고, 2022년은 그 보험의 이행 초창기였다. 여기저기서 사고는 터지고 댐을 막기에 허그의 역량은 어림없어 보였다. 통화는 전보다 더 어려워졌고, 여기저기에 부정확한 정보가 너무 많았다. 심지어 허그 홈페이지를 봐도 명확하게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허그에 몇 번이나 전화를 하고, 계약을 진행한 부동산 중개업자에게도 항의와 문의를 하고, 법률구조공단에 찾아가 자문을 구하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그리고 내용증명을 보냈지만 ‘폐문 부재’로 반송되는 가운데, 답답한 마음에 전세계약서에 있는 임대인 집에도 찾아가봤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공항대로에 주소를 둔 오피스텔이었다.

세대가 무척 많은 오피스텔 건물의 우편함에서 일단 해당 호수를 찾았다. 찾아가지 않은 고지서가 내민 혀처럼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정말 집주인은 여기 없는 걸까, 어딘가 도망이라도 간 걸까. 건물 내부에서 누군가 나올 때 문이 열린 틈을 타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한 일이었다. 임대인을 만나도 문제가 해결될 리 없건만(대화가 통할 사람이었다면 일을 이렇게 벌이지도 않았겠지), 뭐라도 해봐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해당 호수 앞. 초인종을 누르기 전, 복도의 정적 속에서 내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 떨리는 손으로 벨을 눌렀다. 잠시 후, 도어록이 해제되는 기계적인 마찰음이 유난히 크게 울렸다.


antonina-bukowska-PpwqEpJ9UaQ-unsplash.jpg 닫힌 문이 마치 거대한 함정이나 농담처럼 느껴지던 오후 (사진: Unsplash, Antonina Bukowska)


문이 열리고 건장한 몸집의 남자가 나타났다. 얇은 러닝셔츠 아래로 드러난 양팔에는 화려한 문신이 휘감겨 있었다. 헉, 나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일순간에 위압감에 몸이 쪼그라느는 것 같았다. 집주인의 나이대나 인상을 상상하며 준비했던 모든 질문이 그 위협적인 무늬 앞에서 증발하고 말았다.

“혹시 고OO 씨인가요?”

“아니, 사람들이 자꾸 찾아오고 난리인데, 저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그는 마치 버튼을 누르면 나오는 안내 멘트처럼 대답하며 신발장 위에 놓여 있던 신분증을 내밀었다. 일말의 당혹감도, 귀찮음도 없는 기계적인 동작. 그가 내미는 신분증은 ‘여기서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걸’ 하는 놀림이나 선고처럼 보였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순순히 그냥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럼 언제부터 여기 사셨나요?”

“6개월 됐어요.”

“그럼 고OO 씨는 모르시고요?”

“네, 그런 사람 몰라요.”

그 말을 끝으로 오피스텔의 문이 눈앞에서 쾅 닫혔다. 그 소리가 이 거대한 범죄의 각본이 완성되었다는 마침표처럼 들렸다. 무력감에 온몸이 녹아내렸다. 영화 속에서나 보던 일을 현실에서 마주하고 나는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다음 주에 마지막 화가 이어집니다.)


토요일 연재
이전 11화화곡동 블루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