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곡동 블루스 (3)

혼자만의 일, 그렇지만 덕분에 해결된 많은 일들

by 홑들

(화곡동 이야기 2편에서 이어집니다. 이 글을 끝으로 화곡동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3. 용기와 연대가 필요한 일

보증보험 이행청구 서류를 준비하는 가운데 고OO 씨가 들어놓은 보험이 화곡동에만 102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강서구뿐 아니라 금천구와 구로구, 인천에도 집이 있었다. 첫 번째 집주인이 알량한 이득에 눈이 먼 소규모의 갭투자 사기꾼이었다면, 두 번째 집은 그야말로 대규모 범죄의 현장이었다. 크게 사업을 한다던 게, 크게 한탕 한다는 뜻이었구나. 이제는 헛웃음조차 안 나왔다.

이후 두 번의 폐문 부재 내용증명 서류를 들고 동사무소에 가서 임대인의 초본을 떼봤다. 그의 주소는 여전히 공항대로로 되어 있었다. 행정 서류상 임대인의 주소는 그대로였지만 실제 그가 그 집에 살지 않는다는 것을 안 이상 내용증명을 더 보내는 건 의미가 없었다. 처음에 계약 해지 의사를 밝혔을 때의 녹음본을 속기사 사무실에서 녹취록으로 작성해 공문서 제출시 요구되는 형식을 갖추고, 셀프로 전자소송을 진행해 임차권등기를 설정하고, 임차권등기명령 결정문을 받았다. 거대한 사기판에서 나는 홀로 생소한 법리를 익히고 서류를 꾸리며 스스로를 구출해내야 했다. 그날 밤 컴퓨터로 결정문을 읽으며 서울에서 세입자로 사는 일이 왜 이토록 철저한 ‘자력갱생’이어야 하는지 자꾸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허그에서는 전세계약을 맺을 때 계약금과 잔금 등을 주고받은 이체 내역도 요구했다. 처음 계약금은 부동산 측에 전달했었기에 부동산 중개인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나의 송금 내역과 그가 건축주에게 송금한 내역이 필요했다. 중개인도 같은 패거리가 분명해 보이는데, 그들에게 협조를 구해야 하는 현실에 지독한 모멸감이 일었다. 하지만 어쩌랴. 내 심사가 어떻든 간에 우선은 무사히 전세금을 돌려받는 게 급선무다.

모든 서류를 준비해서 허그 사무실을 방문한 날. 임대인보증보험의 경우에는 사고일로부터 두 달이 지나야 접수를 할 수 있다는 허망한 답변을 들었다. 예상했던 날짜보다 두 달은 더 시간이 필요해졌다.


20220101_144948.jpg 그림자처럼 긴 자책이 몰려오는 오후



셀과 셀 사이, 과정을 건널 때마다 함께했던 많은 사람이 있다

전력 질주로 서류를 준비하다가 잠시 시간이 나니 자책감이 몰려왔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이사도 다닐 만큼 다녀봤는데 내가 왜 이랬을까 하는 생각에서 헤어나기가 어려웠다. 사기를 당했을 때 피해자에게 가장 힘든 감정은 분노가 아니라 수치심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아마 곁에서 다독이고 일으켜준 손길이 없었다면 그 감정에 더 오래 사로잡혀 있었을 테다.

내 컴퓨터 폴더에는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엑셀 파일이 남아 있다. 내용증명 발송일, 법률구조공단 상담일과 상담 내용, 임차권등기 설정일, 허그 방문일, 보증보험 이행청구일 같은 무채색의 기록들. 하지만 그 칸과 칸 사이에는 엑셀이 미처 담지 못하는 다정한 이름들이 살고 있다.

도통 통화가 되지 않는 허그에 함께 전화해서 문의를 해주고, 인터넷을 뒤져가며 각종 정보를 알아봐주고, 무엇보다 임대인의 집까지 함께 가주었던 J가 없었다면 그 시기를 어떻게 버텼을까 싶다. 그리고 늦어진 보증 이행 탓에 구멍이 난 자금 계획을 메워준 H선배, 오랜 친구 S, 일로 만난 S, 동기 W가 없었다면 얼마나 더 힘들었을까. S는 “더 필요하면 말해”라는 말로 얼어붙은 내 마음을 봄바람처럼 녹여주었었지.

J가 내어준 시간과 헌신, 주변 사람들의 따스한 손길은 내가 ‘피해자’라는 낙인 속에 갇히지 않도록 해주었고, 여전히 사랑받고 신뢰받는 ‘사람’임을 일깨워주었다. 덕분에 화곡동이라는 긴 터널에서 탈출하고 생존해, 다시금 누군가의 다정한 이웃이 될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당사자로서 홀로 고독하게 처리해야 할 일투성이지만, 도와달라고 말할 용기가 있다면 고립무원 속에 속수무책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배웠다.


“사실, 영혼이 닳는 일이야.”

L에게 털어놓았던 그 말은 진심이었다. 마치 사포 위를 구르는 것처럼, 매일매일 내 안의 믿음이 조금씩 갈려 나갔었다. 사람에 대한 믿음, 시스템에 대한 신뢰, 사회적 안전망에 대한 기대 같은 것들이. 하지만 주변의 손길은 영혼의 마모를 막아주는 마지막 보루가 되어주었다.

그러고 3년이 흐른 지난해 봄, 경찰청에서 카톡을 받았다. 화면 위로 떠오른 글자들을 한참이나 응시했다. 고OO 전세사기 건에 대한 수사에 협조를 바란다는 문구에는 “보이스피싱이 아닙니다”라는 말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쩌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믿지 못하는 사회를 만들고 그 안에서 살게 되었나. 그리고 사건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면 그 의사를 표현해주면 된다고 했다.

“당연히 협조해야죠.”

수사관과 통화하면서 자연스레 나온 말이다. 수많은 사람을 비탄에 빠뜨린 작당을 잡는 데 도움이 된다면 뭐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사건을 복기하자니 괴로운 마음이 몰려왔다. 당시 준비했던 서류 등이 컴퓨터 속 폴더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을 열어서 다시 들여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잠들지 못하던 긴 밤의 나날, 미칠 듯이 뛰던 심장, 문신한 남자의 서늘한 눈빛이 떠올랐다. 그래서 한동안 모른 척을 하다가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수사관과 다시 통화를 하고 요청한 정보를 전달하고 서류도 전해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은 해야만 했다. 며칠 후 대검찰청 형사사법정보시스템이라는 곳에서 카톡 알람이 왔다. 고OO 외 9인에 대한 사건번호와 배당 검사가 적혀 있었다.


그것이 비록 한 시절이나마 부디 손 내밀 누군가가 곁에 있기를

달랑 가방 하나로 시작한 서울 생활이다. 혼자 사는 일의 난감함을 참 많이도 겪었다. 탐욕에 찬 사람들을 참 많이도 목격했다. 그렇지만 그럴 때마다 번번이 손을 잡아줄 누군가가 곁에 있었음에 감사하다. 아직도 가끔, 그때 J와 함께 걷던 오피스텔 앞 보도의 감각이 떠오른다. 딱딱한 바닥, 늦은 오후의 햇빛, 침묵과 울렁거림의 시간. 완전히 무너지지 않게 붙들어준 건 언제나 제도가 아니라, 사람의 체온이었다.

서울의 어느 골목, 여전히 누군가는 불안한 잠을 청하고 있을지 모른다. 부디 그 곁에, 손을 내밀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있기를. 그리고 이 기록이 그들에게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라는 나지막한 위로의 말이 되기를 바라본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