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낱말처럼 외로웠다

자매애를 꿈꾸며

by 홑들

새벽 4시, 화재경보가 울린다. 며칠째 경보가 잘못 울린다는 걸 알면서도 뭔가 걸쳐 입고 밖으로 나가봐야 하는지 그냥 그대로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갈피를 못 잡고 멍하니 있는 사이, 이번에도 역시 잘못 울린 화재경보라고 안내 방송이 나온다. 안도감보다는 허무함이 앞선다.

아, 삶은 이처럼 무방비하구나. 이게 정말 화재경보였으면 어땠을까. 거짓말처럼 반복되는 경보가 양치기 소년이 되어 언젠가는 호되게 뒤통수를 맞는 건 아닐까. 시끄럽게 귀를 때리는 경보음은 사라진 지 오랜데, 공허함은 그보다 끈질겨서 귀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한번 달아난 잠은 하얗게 날이 밝을 때까지 그예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에게도 연락할 수 없는 진공의 새벽. 이곳에 함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나눌 수 없는 감정. 종으로 횡으로 생각해봐도 누구에게도 연락할 수 없는 새벽, 영화 <그래비티>의 산드라 블록이 생각나는 건 과장이 아니다. 어쨌건 그 순간만큼은 우주에 오직 나 혼자인 것 같다. 허둥댈지언정 누군가와 함께 허둥댔더라면 뭐가 조금 더 나았을까. 긴 밤에 쓸데없이 생각이 길어진다.



common.jpg 가끔은 우주에 오직 나 혼자인 것 같은 기분 (이미지: 영화 <그래비티> 포스터)


스쿠버다이빙을 배운 적이 있다. 빡빡한 일정 때문에 체력은 금세 바닥이 나곤 했지만 바닷속은 아름다웠다. 다른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몽롱한 매혹. 일렁이는 물결과 새하얀 산호초, 만화에서나 봤던 니모가 거기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바닷속 풍경과 별개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따로 있었다. 특별한 자격이 없다면, 바닷속에는 예외 없이 혼자서는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는 지침이 그랬다. 바닷속에서 둘러멘 공기통에 공기가 떨어질 수도 있고, 방향감각을 상실할 수도 있고(육지에서도 길을 못 찾는 나라면 당연히 그럴 테지), 불시에 사고를 당하거나 다치는 등 언제든 긴급 상황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혼자서는 그대로 가라앉고 만다. 함께하는 짝이 있어야 직접적인 도움을 받든, 구조를 청하든 할 수 있다. 그런 짝을 ‘버디(buddy)’라고 부른다.


taisnf-dive-1287181_1280.jpg 스쿠버다이빙에서 버디는 필수(이미지: Pixabay, taisnf)


‘인생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언제부터인가 유행어처럼 떠돌고 있지만, 실상은 한 발짝 떨어져서, 혹은 매우 밀착해서 서로를 돌볼 사람이 필요한 법이다. 예전에 한참 마음이 바닥을 뒹굴고 있을 때 서로 카톡방에 점 하나씩이라도 남겼던 친구가 있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건넜다는 신호는 미약하나마 등대 같은 위로였다. 바닷속만큼이나 이생도 안전하지는 않기에, 적막하기에 한밤의 황망함이나 긴급함에 함께 대응해줄 사람이, 언제든 거리낌 없이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버디가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끔은 한다.


그런데 최근 머리를 띵하게 하는 글을 만났다. 진송은 「친밀하지 않은 돌봄」에서 이 생각을 비틀어놓는다. “친밀성만이 사회적 상호의존을 보장할 수 있을 때, 오히려 필요한 것은 친밀성의 확장이 아니라 친밀성과 생존 사이의 급진적 단절”이라는 말에 시야가 확 트였다. 맞는 말이다. 친밀한 관계가 없는 ‘혼자’도 안전하게 돌봄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친밀성만이 생존의 보루가 될 때 우리는 오히려 취약해진다. 사실 새벽 4시 화재 경보가 울릴 때 나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도 다정한 연인의 문자나 친구의 걱정이 아니라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관리실의 방송일 테다. 그렇다고 진송이 친밀한 돌봄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다만, 친밀하지 않은 돌봄이 먼저 넓게 전제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친밀한 버디가 정서적 공기통이라면, 친밀하지 않은 버디는 사회라는 거대한 바다의 안전벨트인 셈이다. 우리에게는 사적인 돌봄과 공적인 돌봄 모두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엄마, 내가 언니를 낳아달라고 했잖아.”

이건 말할 때마다 어김없이 웃음을 불러오는 마법의 문장이다. 어릴 때부터 엄마에게 “언니를 낳아줘”라고 했던 농담을 지금도 간간이 하는데, 그러면 백발백중 웃음꽃이 만발한다. 어릴 때부터 자매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 와중에 내가 언니가 되긴 싫어서 언니를 낳아달라고 한 속내가 자못 앙큼하게 귀엽다.


가족 중심주의로 환원하는 것 같아 좀 아쉬운 면이 있긴 하지만, 복잡 미묘한 감정을 자아내는 ‘혈연’이라는 단어를 걷어내고 보면, 부모가 같고 성장 환경이 같고 성별이 같은 또래가 곁에 있다는 건 꽤 축복이 아닌가 생각한다. 다툼과 화해를 반복하겠지만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를 누구보다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관계, 인생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는 관계, 누구보다 친한 친구. 형제자매 조합 중 자매 간의 관계가 가장 긍정적이고 친밀하며, 흔들리지 않는 정서적 지지 덕분에 삶의 질이 높다는 건 연구 결과를 빌려 말하지 않아도, 엄마와 이모 관계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caroline-hernandez-tJHU4mGSLz4-unsplash.jpg 자매가 필요해 (이미지: 사진: Unsplash, Caroline Hernandez)


자매가 없다는 건 꽤 오랫동안의 아쉬움이었다. 그래도 사는 동안 자매 같은 인연도 꽤 만났다. 나보다 더 내게 공감하고 나조차도 몰랐던 나를 발견해주는 그들이 있어서 꽤 따뜻했다. 각자의 바다를 헤엄 치지만 가끔 서로의 공기통을 확인하는 그 눈빛만으로도 괜찮아지는 순간이 있었다. 해결이 아니라 공감의 한두 마디에 눈가가 뜨끈해진 때도 있었다. 늘 곁에 있을 수는 없지만 그런 나날을 잘 만들어가고 싶다. 그런 순간을 소중히 모아두고 싶다.


낱말처럼 나 혼자 떨어져 있는 것 같은 밤이면, 나라는 낱말에 자매 같은 친구들을 덧대어 문장을 만들고, 낯 모르는 사람과도 부담 없이 돌봄을 주고받는 널따란 안전망을 생각하며 문단을 만든다. 낱말처럼 외로운 우리가 서로에게 기대어 문장이 되고 문단이 될 때, 삶이라는 긴 밤은 비로소 의미 있게 흐른다. 딱 맞지 않아도 뭔가 얼기설기하더라도 혼자이되, 아주 혼자이지는 않은 사람들이 하나의 책이 되는 상상을 한다.

So, Would you be my sister?





연결 콘텐츠


토요일 연재
이전 17화서울에 가면 헤어지자고 말하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