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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치 May 08. 2023

파-도

파솔에 관한 꿈을 꿨다. 여행길에 잠시 동행으로 있던 나와 작별하고 돌아가는 길에 목적지를 집이 아닌 우주정거장으로 바꿔 결국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는 꿈이었다. 꿈을 굳이 현실/비현실로 나누는 것도 웃기지만 주인공이 그였다보니 비현실적인 전개도 그럴싸해 보였다. 여차저차해서 우주정거장에 당도했노라고 연락이 온 건 거대한 안개구름이 짙게 깔린 탓에 내가 사는 도시에서는 하늘도 잘 보이지 않는 그런 날이었다.  


파솔을 만난 것은 한 온라인커뮤니티의 정기모임에서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부쩍 외로움을 타던 시기였다. 학교를 벗어나서는 따로 인간관계를 만들어 본 일이 없던 내가 평소라면 근처에도 안 갔을 낯선 곳에 발길을 들인 건 우물 안개구리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몸부림의 일환이었다.

'문화예술을 사랑하고 향유하는 클럽'이라는 미명 아래 모인 사람들은 나이도 직업도 각양각색이었다. 정모라는 핑곗김에 모여 술을 마시고 왁자지껄 떠드는 사이에 어디선가는 자기 짝을 찾는 눈동자가 바쁘게 돌아가기도 하는 모양이었지만 모임에서 나잇대가 꽤 어린 축에 속하던 나는 수많은 언니오빠들 사이에 앉아서 눈을 꿈뻑이며 겉돌았다.


부산에서 온 파솔은 말 그대로 ‘글빨’이 뛰어났다. 악기를 잘 다뤄서인지 가볍게 올리는 짧은 방명록에서도 운율을 가지고 놀면서 피아노를 치듯 자판을 두드렸다. 허세 가득하게 본인을 꾸미기 바쁜 글들 사이에서 거드름 피우지 않는 솔직하고 유머러스한 파솔의 글을 마주할 때면 파도가 부서질 때처럼 상쾌한 기분이 들었고 그의 글 주변엔 사람들의 웃음도 함께 부서졌다.


뒤늦게 고백하자면 우리가 어떤 계기로 친해졌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종로 근처에서 열리던 번개에서 또는 클럽에서 친해진 몇몇 멤버들이 만나는 자리가 있으면 함께 어울리곤 했다는 것 정도 밖에는. 파솔은 나와 나이차가 훌쩍 났지만 언니 오빠 행세를 했던 다른 누구보다 나를 동등한 친구로 대해줬다. 그래서였을까 시간이 흘러 더 이상 모임에 나가지 않게 됐을 때에도 유일하게 그와는 연락을 이어나갔다.


고향을 떠나와 서울에서 살고 있다는 공통점 말고는 취향도 성격도 전부 달랐지만 좋아하는 것에 몰두해 있을 때의 집요함 만큼은 꼭 닮았었다. 파솔이 좋아하는 글과 사진 그리고 음악, 내가 좋아하는 영화와 그림 이야기를 할 때면 몇 시간이고 서로 자기 얘기만 앞다투어했는데 항상 각자 사랑하는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자는 말로 끝이 났다.


파솔은 매순간 진심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첫 회사에서 박봉과 부당함에 시달리다 결국 퇴사를 했을 때 일거리를 가져다준 것도 파솔이었다. 그가 일하고 있는 악기 판매사이트의 로고를 만드는 일이었는데 지나고 생각하니 로고디자이너도 아닌 나에게 선뜻 일을 맡긴 것은 상처받은 등을 토닥이는 그 나름의 우정어린 응원이었다.

파솔은 꿈, 진심, 희망 따위의 아름다운 말들을 사랑했다. 슬프게도 현대사회에서는 환상만 취하고 쉽게 버려지는 말들일지라도.

내가 이직한 회사에서 빡세게 굴려지다 다시 퇴사를 하고 프리랜서로 일을 하는 동안, 그는 오랜 고향친구와 함께 일을 하다가 배신을 당했다. 부산보다 추운 겨울이 몇 번이나 반복되는 동안 그는 조금씩 그늘지고 쇠약해졌다.


작년 연말 즈음 모든 것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갑작스러운 카톡에 당황스러운 마음 한편에는 어떤 안도감이 든 건, 나이가 들면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기타를 치고 낚시를 하며 살 거라는 그 언젠가의 말이 겹쳐 보여서였다. 숨 막히는 빌딩숲만 가득한 복잡한 서울보다는 넓고 푸른 바다가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서울이라는 도시가 서서히 그를 죽이고 있었을 지 모른다 생각했다.


몽롱한 잠을 지워내며 파솔이 꿈에서 여행을 위해 렌트한 오픈카가 바다 근처 공항에 우두커니 남겨졌을 풍경을 그려봤다. 피아노 건반을 닮은 하얀색 차가 햇빛에 반짝거리는 모습이 쨍하게 아름다웠다.

바다와 모래사장밖에는 없던 그 옛날 광안리 앞바다로 틈만 나면 뛰어가 놀곤 했다는 파솔의 어린시절 모습이 파도와 함께 끝도 없이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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