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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관성 Consistency Aug 09. 2018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

아담 스미스가 말한 공감의 원리란 무엇일까?

*본 글은 포스텍과 카이스트가 발간하는 POKAS ON 잡지에 기고 예정인 글을 발췌 및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출처: Google Image>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 대부분은 사회과학에서 활발히 언급되는 아담 스미스라는 학자가 쓴 저서는 다 읽어보지 못했겠지만, 그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과 ‘자유방임’의 개념에 대해서 한 번쯤은 들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 두 용어가 후속 세대로 하여금, 스미스를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도록 하고, 그를 경제학자로 기억되게 했다. 본 기고는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가 아니라, 철학자 아담 스미스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대학원에 입학한 이후 엄밀한 방법론이 추구하는 이상에 대해 한때 지쳤었고, 그 엄격한 틀에서 벗어나 세상을 보다 폭넓게 바라보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다. 


그 찰나에, 타대학 학점교류를 통해 아담 스미스의 두 역작,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을 매주 읽어가며 소통하는 수업을 접하게 되었다. 이는 나에게 많은 영감과 교훈을 줬는데, 그것이 학문적 영역을 넘어서서, 삶을 살아가고 현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한 취지에서 본 글에서는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스미스의 ‘국부론’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생소하지만 현대사회를 해석하는 창(window)이 되어줄 법한 내용이 담겨있다고 보이는 ‘도덕감정론’에 대해서만 이야기의 범위를 한정 짓고자 한다. 특히, 그 저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공감’에 대한 내용을 위주로 이야기를 할 것이다.  이후에는 '국부론'에 관한 내용도 본 매거진에 게재할 예정이다. 


<출처: Bauman Rare Books>


본격적으로 이야기에 들어가기 앞서, 해당 도서에 대한 소개를 짧게 해보면 다음과 같다. ‘도덕감정론(Theory of Moral Sentiments)’은 1759년에 발간되었으며, 스미스를 당대 유럽의 정상급 학자로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된 책이다. 이 책은 스미스가 살아있는 동안 계속해서 수정을 했을 정도로 그의 저서들 중에 가장 애착을 가진 저서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 책은 스코틀랜드에서 형성된 계몽주의 사상에서 제시하는 큰 생각의 줄기를 반영하고 있는데, 그 사상과 관련 학자들을 논하는 것은 본 글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라 생략한다. 


도덕감정론에서 스미스는 ‘공감’, 영어로는 ‘sympathy’로 해석되는 개념에 대해 풍부한 이야기를 한다. 앞에서 언급했던 계몽주의 사상의 핵심 내용들 중 하나로 대표되는 것이 바로 공감의 개념이다. 참고로 ‘sympathy’의 어원은 스코틀랜드 생리학자들이 신체 한 부분의 고통이 다른 부분으로 이어지는 현상을 칭하는 용어로 맨 처음 사용했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추측되고 있다.  


공감은 어떤 원리에 의해 일어날까? 스미스는 특정 감정을 느끼고 있는 A라는 사람과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B라는 사람이 있는 상황에서, B가 상상력을 발휘하여 A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자신을 대입시킴으로써 공감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즉, 내가 상상을 통해 타인이 되어 봄으로써 상대방이 어떠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파악하여 공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감정은, ‘슬픔’과 ‘기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분노’와 같이 격한 감정을 포함하여 어떤 것이든 해당된다. 하지만, 여기서 과연 둘 사이의 감정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서 스미스는 완전한 감정의 일치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서로에 대한 공감을 통해 촉진되는 ‘사회의 조화’를 가져오기에 충분한 정도는 어느 공감 과정에서나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굳이 상대방의 마음을 온전히 알아주지는 못하더라도 그 사람과 소통하는 것 자체가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출처: ESL Library>


공감의 원리를 예시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이 할 수 있다. 우리도 친한 친구가 취업이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아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그 친구가 얼마나 힘들지에 대해서 그가 처한 상황을 이해함으로써 혹은 그 친구가 털어놓는 이야기를 통해 이해를 하면서 우리의 감정을 이입하고 공감하는 상황을 일상에서 자주 마주하게 된다.  


누군가는 그러한 공감이 시간 낭비이며 가만히 놔두면 해결되는 상대방의 문제에 개입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치부하기도 한다 또한 상대방의 감정을 헤아림으로써 본인에게 오는 부정적인 영향력에 대해서 회의적인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상대방이 연구 때문에 몹시 힘들다고 말하는 상황에서 내가 그것을 이해하고 감정에 대해 공감하고자 하는 과정을 겪다 보면 나 또한 괜히 연구에 대한 두려움이나 힘듦이 떠오르는 것과 같은 부정적인 성향의 감정이 나타날 수도 있다. 특히, 자신의 직업적 성공과 물질적 우월함을 위해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질주하는 이들이 많은 요즘 사회에는 그러한 자기중심적 가치관은 팽배하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흔히, 가만히 내버려두면 다시 돌아오는 감정의 쳇바퀴를 언급하며 공감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을 합리화하곤 한다. 하지만 감정이 다시 되돌아온다 한들, 그 당시가 너무 힘들다면 그러한 감정의 복귀 성향은 다소 그 정도를 간과하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다음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공감을 해야 하는 것인가?’ 


이에 대해 스미스는 공감이 주는 효용과 기쁨에 대해 말하는데, 이는 우리가 흔히 쓰는 ‘슬픔은 나누면 줄어들고, 기쁨은 나눌 때 두배가 된다’라는 표현과 일맥상통한다. 즉, 상대방의 슬픔에 공감함으로써 상대방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있기 때문에 안심이 되고, 상대방이 기뻐하는 상황에서는 공감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즐거움이 그 기쁨을 더 크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생각을 해보면, 친구가 힘들어할 때 그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통해 그가 위로를 받는 것을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기쁨을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새벽에 친구가 힘이 들다고 전화가 오면 눈을 비비고 일어나 끝까지 들어주고 다시 잠에 들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친구가 취업이 확정되었을 경우에도, 우리는 마치 우리 일처럼 기뻐하고 그 분위기는 주변에 긍정적으로 퍼져서 기쁨의 정도가 늘어나게 된다. 물론, 시기와 질투심에 의해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남과 비교하고 남을 시기하는 것은 불행한 삶의 표본임이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각자가 판단하여 행동할 몫으로 남겨두겠다. 


다시 공감이 주는 효용 이야기로 돌아가서, 우리가 대표적으로 아는 개그맨 장동민과 유재석 일화에서도 공감이 주는 효용과 그 의미를 살펴볼 수 있다. 2015년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장동민은 예전에 매우 힘든 일이 있어서 혼자 술을 마시다가 문득 유재석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유재석은 친분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후배인 장동민의 고민을 끝까지 묵묵히 들어주고, 비가 내리는 날이었는데 택시를 태워 보내며 가진 현금을 다 주면서 택시비와 부모님 용돈을 챙겨주었다고 한다. 이때 장동민은 유재석이 공감해주고 경청해주는 것에 너무 큰 위로를 받고, 새로운 마음가짐을 통해 개그맨으로서 또 다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언급했다. 여기서 유재석이 비가 오는 날에 나와서, 상대방의 감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한 것은 스미스가 말하는 공감의 기쁨과 효용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가 있다. 자신이 공감해줌으로써 상대방이 느꼈을 위로와 기쁨을 통해, 본인도 덩달아 기뻐지는 것이 공감을 이끄는 큰 동기부여가 된다.  


여전히 공감이라는 것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선, 아무래도 그들이 그렇게도 중요시하는 ‘성공’과 연관 지어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나는 유재석이 긴 무명생활을 견뎌내어 지금의 성공을 누릴 수 있는 한 가지 비법이 바로 ‘공감’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는 존경받고, 올바른 방법으로 성공한 모든 이들에게 적용 가능한 일반화된 이야기다. 그들은 살아오면서 타인의 감정을 공감하고 배려하기 위해 본인이 처하지 않은 상대방의 상황에 대해 끊임없이 상상하는 노력을 했을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상대방이 처한 상황의 의미에 대해 본인이 놓친 것은 어떤 것이 있는지를 파악해서, 자신의 관점과 감정을 수정하게 되고, 이는 자신이 상대방에 대해 가진 생각과 감정에 대해 스스로 비판하고 개선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이것은 결국 세상을 바라보는 넓은 시야를 갖추는 과정으로 이끌어서,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공감의 과정은 인간관계 이외에, 어떤 일을 하면서도 함께 일하는 이들의 관점을 폭넓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능력을 길러주어, 과업을 완수하는 과정에서 보다 더 개방적인 접근을 하도록 해준다. 결론적으로 공감은 상대방과 나를 기쁘게 하며, 나를 사회에서 성장시킬 수 있는 생산적인 활동이라는 것이다. 


<출처: Renegade Inc>


우리는 전력질주를 통해 무언가 성취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규범적 가치에 매몰되어, 주변을 돌아보는 시간을 사치라 생각하고, 더 나아가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기를 잠시 미루는 경향이 있다. 만약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를 반성하는 것이 시간 낭비라, 성공의 궤도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두려움이 드는 것이라면, 공감은 오히려 성공에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하는 묘책이 되지 않을까? 지금 당장 우리 주변에 누군가의 청취와 그것을 통한 공감을 필요로 하고 있는 이들에게 밥 한 끼를 제안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리하면, 그들이 처한 상황과 힘듦을 헤아리는 공감의 과정에서, 우리 또한 한층 더 성장하고 건강한 자아를 갖추게 될 것이라 믿는다.  

‘다른 것 못지않게 공감도 열심히!’라는 마지막 메시지로 본 글을 매듭 지어 본다. 


출처:

Smith, A. (2010).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Penguin.

Broadie, A. (2006). Sympathy and the impartial spect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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