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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관성 Consistency Aug 27. 2018

#3 사회과학에 대한 고찰

'통계적 유의미성'에 대한 집착이 불러온 지식 토양의 위기

참고 문헌: Postman, N. (1984).Doing Social Science. ETC: A Review of General Semantics, 41, 22-32


 저자는 사회과학연구가 어떤 형태를 갖추어야 하는지, 그리고 연구의 목적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서술한다. 현재는 더 심각하지만, 1980년대 당시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이미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science'  형태를 갖추기 위해 수리적이고 실증적인 접근을 만연하게 해오고 있었다. 자연을 탐구하지 않는 사회과학 연구자들의 과도한 실증주의적 접근법은 사람과 사회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와 통찰을 불러일으켜야 하는 사회과학연구 본연의 가치를 훼손시키고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여기서, 자연과학은 자연에서 나타나는 물리적 법칙과 같은 process 를 연구하는 것이고 사회과학은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인간 행동의 패턴과 규칙에 관해 탐구하는 서로 다른 본질을 가지고 있다. 저자가 과도한 실증주의적 접근법에 대해 비판한 것은, 사회과학은 자연과학처럼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관한 현상과 관행을 탐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엄청난 증명과 예측이 불필요하다는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과학연구는 어떤 형태를 갖춰야 할까? 이에 대해 저자는 사람의 행동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과 논리적인 스토리텔링을 하는 것이 사회과학의 형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 사회과학 연구자들이 증명 이라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사회과학 연구 대상은 증명을 통해 해석되어야 하기 보다는 논리와 개념의 깊이와 설명에 좀 더 치중해야 한다. 즉, 다양한 주장들이 쏟아진다 할지라도 그것이 실제 인간의 행동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보편적인 이해를 가져올 수 있다면 적절한 사회과학의 형태를 뛰고 있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사회과학연구의 목적은 해당 분야에 기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이해하는데 기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회적 생활의 진리를 재발견하고, 인간의 도덕적 행동에 관한 비판을 통해 나타난 이미지와 아이디어를 전파함으로써 사람들이 삶에 대한 이해를 하며 윤택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해당 연구의 목적이라고 주장한다.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학생들 중 한 명으로써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Management 분야에서 소위 말하는 top-tier journal (e.g., ASQ, AMJ, JAP, SMJ) 에 실린 최근 연구들을 보면 상당히 정교해 보이는 방법론과 어떻게 모았을 지 궁금하게 만드는 신선한 데이터를 활용한 경우가 많다. 그런 문헌을 읽고 나면 해당 연구자들을 학자 혹은 이론가로 인식하기 보다는 통계적 지식이 해박한 기술자로 바라보게 된다. 여기서 그들의 노력을 무시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왜냐면 그들이 추구하는 방향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Penrose (2009) 의 ‘The Theory of the Growth of the Firm’,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1776)과 같은 도서 혹은  March (1991) 의  ‘Exploration and Exploitation in Organizational Learning’ 을 읽어보면 정교한 방법론이나 화려한 테크닉이 등장하지 않지만 현상의 근본적인 매커니즘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그것이 어떤 케이스를 설명하는데 활용될 수 있을지를 상당히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도서 혹은 클래식 페이퍼를 읽었을 때 느껴지는 통찰력과 최신 문헌을 읽었을 때 느껴지는 통찰력 정도는 큰 차이가 있다. 


이미 사회과학 분야의 학계는 방법론을 강조하는 실증주의적 방향으로 과도하게 쏠려 있고, 주류 대학의 테뉴어 시스템도 빠르게 많은 양의 논문을 찍어내는 기술자가 되도록 하는 압력을 주는 데 한 몫을 하고 있다. 이번에 참고한 논문의 저자가 말한 ‘삶 혹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하는 것을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사회과학의 목적을 되새겨보면, 저널에 개재하는 수십 편의 논문 보다는 논리적인 설명을 기반으로 하여 현상과 이슈를 짚어보는 책 한권이 더 의미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책을 써내는 것을 실적으로 인정해주는 대학은 그리 많지 않고, 좋은 곳에 많은 논문을 개재하는 것으로 대부분 결정되는 연구자의 명성을 고려해보면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이 흘러가는 이 구조적 흐름을 수용해야 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사회과학에서 자신의 주장을 정답에 근접한 것이라고 보이기 위해 화려한 수리적 검증을 활용하는 것이 큰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은 여전히 씻어낼 수가 없다. 깊이 있게 고찰하여 추론해낸 자신의 주장을 알리고 싶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데이터가 없어서 대중적 지식으로 전환시키지 못한다면 사회과학 분야는 오히려 도태되는 것이다. 이런 학계의 분위기가 더 이상 참신한 이론과 이론적 발전은 활발하게 일어나지 않는 것의 중대한 원인들 중 하나라고 나는 생각 한다. 


지금까지 언급한 사회과학 분야에 존재하는 구조적 문제로 인해 ‘진정한 사회과학으로 가는 탈출구’ 는 점점 더 작아져 가고 있다. 이 상황에서 연구자, 저널, 대학 등등의 이해관계자들은 지식 창출과 보급에 기여하기 위해 요구되는 각자의 역할을 어떻게 새로 정의해야 할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이 아티클은 학문적 기여가 아니라, 보편적인 지식에 대한 기여를 하는 것이 삶에서 발생하는 practice 를 연구하는 사회과학연구의 역할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었다.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이들은 이미 형성된 주류 시스템에 순응할 확률이 높지만, 끝없이 사회과학의 본질에 관해 스스로를 고찰해보는 자세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최근, 모 공기업 CEO와 대화를 나눈적이 있는데, 그는 '업의 본질'을 강조했다. 어떤 분야든 그 분야에서 추구해야하는 본질을 알지못하면 얕은 성과와 기여만 만연하게 된다는 것이다. 경제학자 알프레드 마샬은 그의 저서 'Principles of Economics(1890)'에서 경제학은 시장 경제에 대한 과도한 초점에서 벗어나 경제활동을 하는 인간에 대한 이해로 옮겨가야할 필요성이 있는 학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회과학이라는 업의 본질은 결국 '인간의 삶과 맞닿아있는 현상 탐구를 통한 지식 창출'이 되어야만 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도 '어떤 글이 좋은 글이냐?'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때에는, 그 글이 얼마나 사람을 이해하고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는지를 가장 먼저 생각해보면 좋을 것이다.



출처

Alfred, M. (1895). Principles of economics.


Postman, N. (1984). Social science as theology. ETC: A Review of General Semantics, 22-32.


Penrose, E., & Penrose, E. T. (2009). The Theory of the Growth of the Firm. Oxford university press.


March, J. G. (1991). Exploration and exploitation in organizational learning. Organization Science, 2(1), 7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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