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선란, 「전기로 꿰맨 사람」

by 고양이

나는 스스로를 하나라고 믿는다. 이름이 하나고 몸도 하나니까.

그래서 의심하지 않는다.
지금 생각하는 이 목소리가 어제의 나와 같은 존재라고.

그런데 가끔은 낯선 순간이 있다.

어제의 내가 한 선택이 오늘의 나에게는 이해되지 않을 때.

분명 내가 한 일인데 왜인지 타인의 기록을 읽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날이 그랬어요.)


그때 나는 아주 천천히 생각한다.
나는 정말 하나일까.

누군가는 말한다. 기억이 이어져 있으니 하나라고.

맞는 말이다. 나는 하나의 시간을 지나왔고 같은 장면을 공유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만약에, 만약에 말이에요.) 완전히 같은 기억을 가진 두 사람이 존재한다면. 태어나서 지금까지

모든 경험과 감정, 선택의 흔적까지 단 하나도 어긋나지 않는 두 존재가 있다면 그들도 같은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아마도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도 결국은 둘이라고.

이유는 단순하다.
지금 이 순간 그들은 서로 다른 방향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창밖을 보고 다른 한 사람은 고개를 숙인다. 그 아주 사소한 차이 하나로 두 사람의 시간은 갈라진다. 기억은 과거를 묶어주지만 의식은 현재를 갈라놓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기억을 가질 수는 있어도 같은 현재를 살 수는 없다.



아침의 나는 밤의 나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며칠 전의 나는 지금의 나를 낯설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같은 이름을 사용한다.

하나라고 부르기 위해서.

하지만 나는 완전히 하나인 적도 완전히 둘인 적도 없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말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나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타인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를 이해하려고 한다.

완전히 같아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위해서.

아니면 돌아갈 수 없는 '같았던 나'에 대한 향수 때문인지도.



"육체로부터 분리되기 전에 각자의 기억을 만들고 분리하는 기간을 가집니다. 들판에 울타리를 짓는 행위지요. 분리되기 전부터 기억의 독립을 이루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분리됐을 때 기억과 자아가 스펀지처럼 듬성듬성 구멍이 난 기분이랍디다." -천선란, 「전기로 꿰맨 사람」중에서


우리는 생각보다 더 몸이라는 형태에 깊게 묶여 있는지도 모른다.

육체를 벗어나 정신만 남는다고 해도 그 상태를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기억과 자아는 단단하지 않다.

그래서 소설 속에서는 분리되기 전 각자의 기억을 따로 세우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나의 들판에 울타리를 치듯, 서로의 경계를 나누어 두는 과정.

그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자아는 흩어지고, 기억은 구멍 난 스펀지처럼 제 형태를 유지하지 못한다.

어쩌면 그래서일까. 한 번 육체를 포기했던 존재가 다시 몸을 원하게 되는 이유는.


이미 버려진 몸은 돌아오지 않는다.
썩어버렸거나, 태워졌다. 아니면 어딘가로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은 선택은 하나뿐이다.
여기저기 흩어진 것들을 주워 전기로 엮어내는 것.

그렇게 만들어진 몸은 더 이상 이전의 몸과 같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몸을 다시 가지려 하는 이유는 단순히 ‘형태’를 되찾기 위해서가 아닐 것이다.

그건 아마도 그 몸이 한때 느꼈던 감각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른다.

차가움, 따뜻함, 통증, 숨이 차오르는 순간.

살아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확인하던 방식들.


우리는 종종 그 감각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다.

아프지 않기 위해서 혹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아무것도 느끼지 않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감각들조차 삶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사라지고 싶은 감각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방식이 된다는 것.

결국 우리가 붙잡고 싶은 것은 몸이 아니라, 그 몸을 통해 '지금 살아 있다'라고 느끼던 순간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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