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해석당하는 아픔

by 고양이

아주 오래된 영화가 있어요.

<공동경비구역 JSA>(2000)이라는 영화인데,

남한의 이수혁 병장(이병헌)과 북한의 오경필 중사(송강호)가 판문점에서 서로 마주 보며 근무를 서던 중이었어요.

어느 순간, 이수혁의 그림자가 군사분계선을 살짝 넘게 되죠.


"야야야, 그림자 넘어왔어. 조심하라우."

오경필 중사의 말에 이수혁 병장은 태연한 척 한 걸음 뒤로 물러서요.


저는 이 장면이 누군가와 가까워지려다 한발 물러서는 저의 모습 같아서 쉽게 넘겨지지 않아요.



누군가를 알아간다는 행위가 무례한 일은 아닌지 항상 생각해요.

알아간다는 건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의 경계를 침범하는 일이니까.


'얼마나 알아야 그 사람을 안다고 말할 수 있나요?'


우리는 왜 만나는 사람을 알려고 할까요.

그 사람을 정말 ‘이해’하고 싶어서일까요. 아니면 그 사람의 특성을 빠르게 파악하는 게 나를 더 ‘안심’시키기 때문일까요.

저의 경우 타인에 대한 온전한 이해든, 자신에 대한 이해든 항상 실패했어요.


매일 해석당하는 게 익숙해지면 이제는 어떻게 해석당하고 싶은지를 생각해요.

결국 해석당하고 싶은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 같아요.


참. 내 마음은 보여준 적도 없는데 누군가는 이미 다 안다고 말하는 게,

오히려 절 더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하죠.


눈치라고도 하고 사회성이라고도 어떤 사람은 말하더라고요.

이런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어요.

"어 자긴 눈치가 있네, 형제가 있어?"

"네."

"역시 형제가 있어서 그런지 눈치가 빠릿빠릿하네, 사회성이 나쁘지 않아."


나쁘면 나쁜 거고, 좋으면 좋은 거지, 나쁘지 않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맨날 효율성을 강조하면서 정작 본인은 왜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언어를 구사하는 걸까.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어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질문보다 미소가 먼저 나오는 것도 사회적 훈련의 결과물인 것 같아요.


나는 그 사회성을 위해서 식당에 가면 항상 바깥자리에 앉아 수저와 젓가락을 미리 놓고,

물컵에 물을 절반 조금 넘게 채워요. 그 정도의 물 양을 맞추기 위해서 얼마나 눈치를 보았는지 모르겠어요.

식사가 끝나면 자신의 영웅담과 훈계가 뒤섞인 말들에 고개를 끄덕이며 적당한 호응도 하죠.

그리고 집에 오면 속이 좋지 않아 매실차를 한잔 마시고 더운물로 샤워를 해요.


사실 누군가를 알고 싶지도 않고, 알려주고 싶지 않을 때도 많아요.

그런데 사회생활은 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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