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양쪽 모두 떠난 경우도 있었고, 양쪽 모두 남겨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떠남과 남겨짐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도 많았다.
-최은영, <씬짜오 씬짜오>
반복된다고 괜찮아지지 않는 게 있는 데, 그중 하나가 헤어짐이 아닐까.
나는 검색창에 '이별하는 법', '다정한 이별', '이별 대처법'등을 검색하며 제법 한가해진 시간을 보냈다.
생각보다 이별에 대한 조언은 많았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별하는 것이겠지, 힘드니까 서로가 이별에 대해 그렇게 할 말이 많은 거겠지.
지금까지 기억에 남은 충고는 '이별했으면 다시는 질척거리지 말라.'는 말이었다.
미련이라는 조금은 미려한 말이 있지만 '미련' 역시 질척거림의 한 종류라고 단호하게들 말했다.
조금 더 다정한 위로는 AI의 것이었는데,
'당신은 지금 그때 사랑했던 자신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것'이라는 문장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AI의 말에 수긍하기 어려웠다. 그것이 사랑이었을까. 뭐만 하면 사랑 이래.
AI 창을 닫으면서 생각했다. '역시 거짓말을 하는구나.'
검색하다가 어떤 조언도 와닿지 않으면,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떠난 것일까 아니면 남겨진 것일까.'
누군가는 여전히 그곳에 있다. 함께 있던 나는 그곳을 나왔다.
아무것도 내버려 두고 오지 않은 것 같은데, 무언가를 두고 온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떠나는 사람은 언제나 더 단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조용히 문을 닫았을 뿐 여전히 그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이별의 주도권은 떠나는 사람 쪽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건 누가 먼저 등을 돌렸는지가 아니라,
누가 더 오래 머물렀는지가 좀 더 정확한 기준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 머물렀다.
이미 끝나버린 마음의 기류 속에서도 무언가를 찾듯이 흔적을 되짚었다.
그래서 떠났으면서도, 매일 남겨진 기분에 시달렸다.
갑자기 검색한 내용 중 떠오른 다른 문장이 있었다.
'이별 후 재회해도 결과는 바뀌지 않아. 또다시 아픔은 반복되고 상처만 남을 거야.'라는 말이었다.
결과가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때는 몰랐던 마음 하나쯤은 건져 올릴 수 있을 거라 믿으면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그렇기에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는 말일까.
아픔이 반복되는 이유는 사실, 끝내 이해했기 때문은 아닐까.
어느 날,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햇빛이 문득 따뜻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가 떠오르지 않는 날이 오겠지.
그러면 그날,
나는 진짜로 그 시간을 건너온 사람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