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인스턴트 하게

by 고양이

외국어 영역 시험문제, 대학원에서 읽는 원서, 해외여행, 사이트를 통해 구입한 직구 상품 설명.

그 정도를 빼면 영어 독해할 기회는 거의 없다.

그러다 우연히 책 속 문장 하나에서 이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instant’


나는 라면, 커피, 즉석밥, 정크푸드를 떠올렸다.

‘인스턴트는 몸에 안 좋아.’

‘또 인스턴트 먹네. 그런 거 사 먹으면 안 돼.’

편리하며 맛있고, 쉽게 살 수 있지만 나는 인스턴트를 좋아하는 마음을 그 얇은 포장지와 함께 자꾸만 버리려고 한다.


하지만 문장 속의 instant는 내가 알던 얼굴이 아니었다.

즉시. 찰나. 순간.

이상할 만큼 좋아하는 의미였다.


그래서 ‘인스턴트’라는 말이 조금 억울해 보였다.
입에 올리는 순간 왠지 정크푸드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따라왔다.
성의 없음, 얕음, 대충 같은 기운이 따라붙었다.


언제부터 이 단어를 선뜻 믿지 않게 되었을까.

아마도 문제는 보이지 않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인스턴트커피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만들어졌다.
불을 피우지 않아도 되는 선택 그리고 기다림을 줄여주는 방식으로.

처음엔 분명 고마운 존재였다.

하지만 반복될수록 묻게 된다.


‘이건 줄어든 걸까, 아니면 빠진 걸까.’

과정이 보이지 않는 순간은 조금 의심스러워진다.
나는 습관적으로 너무 빨리 도착한 결과 앞에서 자꾸 정성을 떠올린다.

기다림과 인내가 가치였던 세계에서 즉각 도착한 것들은 아직 덜 익은 얼굴로 보이기도 하니까.


인스턴트커피를 마실 때 종종 생략된 시간을 떠올렸다.

컵 안에는 커피가 있지만 그 이전의 풍경은 없다.
불도, 냄비도, 기다리는 지루함도.

아마 인스턴트가 불편해진 건 빠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앞의 장면이 지워져 있기 때문은 아닐까.

거기에 건강상의 문제까지 더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된다.


어떤 것들은 설명 없이 도착한다.

읽는 순간 이미 이해(오독도 이해의 한 종류라면) 한 상태가 된다.
시간은 거의 들지 않았는데 얕다는 느낌도 없다.

빠른데도 가볍지 않다.


나는 어느 글을 읽고 인스턴트 하게 빠져버렸다.

오래 고민하지도 않았고 천천히 다가간 것도 아닌데 이미 어딘가에 와 있었다.

그건 건너뛰기라기보다 얽힘(양자 얽힘, 한쪽을 들여다보는 순간 다른 한쪽의 표정이 결정되는 현상)에 가까웠다.

함께 있지 않아도 그에 대해 말하는 방식이 곧 나에 대한 정의가 되는 상태를 얽힘이라고 말해도 될까.(양자역학에서는 으스스한 소리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를 덜 겪은 것이 아니라 문득 그에게 다른 방식으로 도착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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