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병모, 『절창』
그거 알아요. 가장 진심일 때가 언제인지? 바로 혼자 놀 때예요.
저는 주로 책을 읽어요 혼자 놀고 싶을 때면.
마침 오늘 구병모의『절창』이란 책을 완독 했네요. 아니 오독하였다고 말해야 좀 더 적확한 거 같아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 오언이라는 남자가 있어요.
한자로는 烏焉.
아마 작가님이 오언성마라는 사자성어에서 가져오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烏’와 ‘焉’이 ‘馬’가 된다는 뜻으로, 글자의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에 혼동하여 잘못 씀을 이르는 말이에요.
또 '아가씨'라는 인물도 등장해요. 사람들의 상처부위를 접촉하면 그들의 생각이나 기억을 읽는 능력을 가진 기인 정도의 느낌이 드는 여성.
그리고 그 '아가씨'에게 오언이라는 남자가 독서생활을 도와줄 독서교사를 붙여주며 이야기가 시작돼요. 아니 그 순간 이미 이야기가 완성되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무슨 말이냐고요? 사실 방금 막 읽기를 마쳤는데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기억이나 정서가 남아있을 때 서둘러 쓰는 거예요.
읽는다는 건 이해를 향한 행위일까요.
아니면 애초에, 이해에 도달하지 못할 걸 알면서 걷는 일일까요.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가능한 일도 아니지만, 설령 그걸 온전히 이해한 순간 우리는 읽음의 가치를 잃어버릴지도 모르니까.
읽고 있다는 건 언제나 이해에 이르지 않는 길인지도,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길을 헤매기를 원하는 것일지도.
읽는다는 건 이해가 아니라 오독의 연습일지도 몰라요.
같은 문장을 읽어도 어제의 나는 이런 뜻으로 읽고, 오늘의 나는 전혀 다른 문장처럼 받아들이니까요.
그 차이는 텍스트가 바뀌어서가 아니라 읽는 내가 바뀌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요.
온전히 이해한다는 가정 자체가 조금 폭력적이게 들려요.
‘이해했다’는 말은 더 이상 묻지 않겠다는 선언같아서, 하나의 답만 허락하는 문장 앞에 서는 기분이랄까요.
반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는 계속 열려 있어요. 그래서 불안하면서도 편안해요.
의문이 남고, 여백이 생기고, 다시 읽을 이유를 발견하죠.
읽고 있다는 감각은 늘 거기에 살아 있어요.
정답이 적힌 팻말보다 '이게 맞나?'하고 혼잣말하게 만드는 문장을 더 오래 붙잡고 싶어요.
읽기는 도착이 아니라 지속이고,
이해는 결과가 아니라 잠정적인 착각이고,
오독은 실패가 아니라 계속되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니까요.
이 글은 서평이 아니라 독서 일기에 가깝습니다.
쓰고보니,
오히려 이해하지 못한 채 적는 기록이라는 점에서『절창』의 정조와 닮아 있는 것 같기도 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