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날, 그러니까 기온이 영상 6도쯤 되는 날이면 강아지와 천변을 걷는다.
그는 늘 지그재그로 걷고 나는 그 옆에서 오늘의 공기를 핑계처럼 들고 걷는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날에는 쉽게 나서지 못한다.
강아지가 추워해서가 아니라 내가 찬바람을 견디지 못해서다.
여름엔 “차라리 겨울이 낫다”라고 말해 놓고 막상 겨우 영하 몇 도 앞에서 약속이나 산책, 마음까지
하나둘 포기하는 나를 보면 나는 더위와 추위 모두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가 보다.
천변 쪽 가드레일에는 드문드문 구명조끼함이 서 있었다.
잿빛 일색의 풍경에서 혼자서만 눈에 띄게.
‘익수사고 발생 시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인명 구조함’
‘사고 발생 시 누구든지 이용해서..’
그 문장들이 강아지의 발걸음과 함께 내 뒤로 흘러간다.
이미 지나가버린 그 단어를 붙잡는다.
구명조끼.
입고, 기다리고, 살아남을 것.
이상하게도 그 문장은 사용법이라기보다는 태도 같았다.
'내 삶의 구명조끼가 있을까?' (혼잣말이에요.)
설마 강아지의 순진무구한 눈을 바라보며 묻진 않았겠지.
그건 대개 하나의 물건이 아니라 위급할 때 자동으로 부풀어 오르는 어떤 마음에 더 가깝다.
예를 들면, 글쓰기.
글쓰기는 물에 빠졌을 때 붙잡게 되는 말랑한 부표다.
세상이 갑자기 깊어질 때 '아, 나 지금 여기쯤 있구나'를 조용히 기록하게 해 준다.
글은 구조 요청이기도 하고 스스로에게 보내는 위치 정보다.
누가 읽지 않아도 괜찮다.
쓰는 순간, 나는 관측된다. 퇴고 따윈 필요 없다. 물에 빠졌는데 언제 고쳐 쓰고 있을 여유가 있겠어요.
그리고 옆에 있는 누군가.
가장 현실적인데 가장 자주 잊히는 구명조끼.
말을 하지 않아도 되고 해결책이 없어도 된다.
그 사람이 '아직 여기 있다'는 사실 하나로 물의 수위는 생각보다 쉽게 내려간다.
존재는 그 자체로 부력이다.
어떤 날은 내가 입고 또 어느 날엔 내가 건네고
날이 따뜻해서 기분이 좋으면, 내가 누군가의 물가에 가만히 서 있기도 한다. 날씨가 기분이 되고, 태도가 된다.
구명조끼함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건 아직 괜찮다는 뜻일까 아니면, 이미 다른 걸 입고 있다는 뜻일까.
어쨌든 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건 물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는 거니, 이 정도면 오늘은 충분히 잘 버틴 거다.
아, 그리고 세 번째 줄에는 이런 말도 있었다.
'인명구조 외의 목적으로 사용을 금하며 파손 시 처벌을 받을 수..'
구명조끼는 자신을 증명하라고 있는 게 아니라 필요해질 때 그냥 입으면 되는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