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나에게

오늘 제대로 읽은 것도 없는데 말이지

by 윤나다



이동 중에 또는 기다리는 동안 책 읽는 걸 참 좋아했다. 지하철 몇 정거장 통과하는 시간에 올라타 읽고 있던 책 꼭지 하나 털고 약속 장소로 가는 깔끔한 맛이 좋았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이의 남은 시간을 세어보며 더 읽고 싶어지는 그 마음이 나의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해줬다. 그런 조각들이 모여 완독이 될 때 그게 뭐라고 곳곳이 미완된 채로 밀려온 내 인생을 잠시 달래주는 처방이 되기도 했다. 시작만 난무한 인생에 완주는 이토록 아름다운 일인데.


대낮에 시작한 책을 붙잡고 그 자리 그대로 얼어붙었던 날의 기억은 가끔 나를 취하게 했다. 날은 다 저물어 가는데 방에 불조차 켤 틈도 없이 앉아 있었다. 어둑해지는 사위에도 창에 흡수되는 빛에만 의지해 따라가기 바빴고 마지막 페이지에 닿아서야 내가 숨을 쉬고 있었음을 순간 인지하게 되면 오직 이 지점에서만 분출되는 쾌감이 머리끝까지 뻗쳤다. 그제야 목이 사정없이 마른 거다. 뻑뻑해진 몸을 일으켜 고개를 들면 아찔한 현기증도 따라온다. 아직 나의 것들은 그 세계에 있어 사방에 보이는 무엇 하나 익숙하지 않은데 그마저 즐거움이 된다. 이런 기억이 앞으로 내 인생에 몇 번이나 기록될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같은 책을 다시 읽는다고 해도 그 시간은 내게 오지 않을 테니까. 그 책을 읽던 시절의 나는 죽었으니.


어디에도 사유의 행적이라고는 없이 그저 자리만 열심히 채우고 있다는 걸 직시하게 될 때면 그런 기억 속으로 숨고 싶어진다. 여전히 벗지 못한 나의 허세란 그런 모양이라 몰입의 지경에 닿을 수 없는 걸 알면서도 서둘러 읽다 만 책이라도 잡고 어제는 몰랐던 세계를 몇 문장이라도 밟아 나갔음을 확인하며 엉킨 호흡을 편다. 그렇게 숱한 페이지를 지나가다 문장 하나에 마음이 넘어져 정신이 아찔해지거나 내내 울고 싶어지면 아무 데나 따라 쓰면서 가려진 감정과 마주하는 일을 비껴가지 않는다. 그럼 조금 나아지는 기분이 든다. 내 처지의 여러 면들이.



아무 책이나 기웃거리며 허투루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다. 저녁 약속이 생각보다 일찍 끝났을 때 이대로 집에 가기에는 내게 많은 걸음이 남아 있어 이 길 끝은 서점이 좋겠다 생각했다. 대형 서점에 나를 풀어놓고 목적도 없이 서성인다. 제목 하나만으로 다 읽어버린 책도 있고 필독서라던데 생각하면서 만지지도 않고 지나가는 책들도 여럿이겠지. 괜히 인적 드문 분야에 서서 편식 없이 읽고 살아야 한다고 마음먹었던 일을 상기하기도 한다. 시인의 말을 찾아보며 이런 감정을 느끼려면 살면서 어딜 놓치지 않아야 하는 걸까 생각한다. 나의 쉬운 행복은 사실 아무 힘이 없는 걸까 싶기도 하면서.


책으로 읽었기에 누구의 시선으로도 시각화되지 않은 채 오로지 글로만 축조된 어떤 장면은 분명 작가가 썼으나 내가 상상한 채로 각인되어 사는 날에 여럿 끼어들기도 했다. 드라마로도 영화로도 가닿을 수 없는 영역에서 영원히 재현되는 장면들은 색도 디테일도 없이 내 머릿속에서 엉성하게 구성되었지만 그 자체로 위로가 됐다. 그런 지점에 매번 굴복할 수밖에 없으니 나는 또 책을 찾는 것일 테고.


요즘엔 더 많은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도 없고 여태 뭐 했나 싶게 나를 허기지게 추궁하는 세계 고전 목록 앞에서 수시로 좌절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냥 지금처럼 읽어도 좋고 억지로 읽지 않아도 읽어둔 날이 있어 괜찮다고 말해주는 나를 유지하며 살고 싶다.